조윤희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국내 조선사들이 외국 선주사로부터 선박 건조계약을 수주하는 데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선수금 환급보증(Refund Guarantee·RG)이다. 국내 조선사들이 정해진 기한 내에 선박을 건조하지 못하거나 파산해 선박건조계약이 해제되었을 때 선주로부터 받은 선수금을 금융기관이 대신 지급해 주겠다고 보증하는 것을 말한다. 외국 선주사는 선박 건조계약 체결 후 그 대금을 미리 선수금으로 지급하기 때문에 나중에 선박 건조계약이 해제될 경우를 대비해 국내 조선사들에게 금융기관이 발급한 선수금 환급보증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한다. 만약 국내 조선사들의 귀책사유로 선박 건조계약이 해제되면 선수금 환급보증서를 발급한 금융기관은 국내 조선사들이 이미 수령한 선수금은 물론 그에 대한 이자(선수금이자)까지 환급해 줘야 한다.
국내 중소조선사들은 2008년경 원자재 가격 상승과 중국 경기 침체에 따른 수주 물량 감소, 국내외 경기 둔화 등으로 인해 심각한 경영상의 위기를 겪었다. 제때 선박을 인도하지 못해 선박 건조계약을 해제당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때문에 국내 금융기관들은 외국 선주사들에게 선수금과 그 이자를 환급하느라 많은 손실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세당국은 외국 선주사들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되돌려받은 선수금이자가 외국선주사들의 국내 원천 기타소득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국내 금융기관들로부터 수십 억 원에서 수백 억 원에 이르는 세금을 추징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국 선주사들이 얻은 소득과 관련해 세금을 원천징수해 납부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리스크 탓에 금융기관들이 선수금 환급보증서 발급을 기피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외국 선주사들이 비록 선수금이자를 지급받았지만 소득을 얻은 것은 아니라며 과세당국의 세금 추징이 위법하다고 판단했다(대법원 2019. 4. 23. 선고 2017두48482 판결 등). 외국 선주사들도 선박금융을 통해 자금을 조달해 선수금을 지급하고 있고, 국내 금융기관들로부터 받은 선수금이자는 그러한 대출금에 대한 이자로 충당되기 때문에 실제로 소득을 얻은 것이 없다며 금융기관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사실 금융기관들이 소송과정에서 외국 선주사들이 선박금융을 통해 선수금을 조달했다는 사정을 일일이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선박금융의 구조와 관행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해 외국 선주사들이 실제로 입은 손해를 보전받은 것일 뿐 소득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대법원이 선박금융의 구조와 관행을 일종의 경험칙으로 인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사정을 입증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도 거래의 현실이나 관행을 잘 설명하면 법원을 설득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