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의 첫 문턱인 안전진단에서 노후 아파트들이 번번이 무릎을 꿇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3월부터 안전진단 평가 항목 중 구조 안전성 가중치를 20%에서 50%로 확대했다. 절차도 늘렸다. 예비안전진단을 거친 후 1차 정밀안전진단(민간기관), 2차 정밀안전진단(공공기관) 등 세 단계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오류동 동부그린의 경우 1차 정밀안전진단에서 통과됐지만 결국 2차에서 고배를 마신 케이스다.
안전진단에서 미끄러진 조합들은 재심사나 공개검증을 요구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새로운 기준이 적용된 안전진단 결과가 속속 나오면서 프로세스에 대해 객관성과 전문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서는 등 논란이 커지고 있다.
◇안전진단 ‘3중턱’에 재건축 잇단 고배=안전진단은 단지의 구조적 안전성과 노후도·주거환경 등을 살펴 재건축이 필요한지를 따져보는 재건축 초기 단계 절차다. 이를 통과해야 정비계획수립 등 본격적인 재건축 사업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국토부는 앞서 지난해 3월부터 강화된 안전진단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서 강화된 안전진단을 통과한 단지는 서초구 방배동 방배삼호 한 곳에 불과하다.
지난 1986년 지어진 노원구 월계동 월계 시영(미성·미륭·삼호3차)은 정밀안전진단 전 예비안전진단에서 C등급을 맞아 좌절했다. 예비안전진단에서 D등급이었던 올림픽선수촌(1988년 준공)은 이달 1차 정밀안전진단에서는 C등급을 받았다.
탈락한 이유는 강화된 구조 안전성 부문에서 벽을 넘지 못해서다. 올림픽선수촌의 경우 주거환경 D등급, 건축마감 및 설비노후도 D등급, 비용분석 E등급에도 불구하고 구조 안전성에서 B등급을 받아 종합 60.24점으로 C등급이 된 것이다.
단계도 늘고 문턱도 높아지자 현재 안전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들은 긴장하는 분위기이다. 마포구 성산동 성산시영과 양천구 목동 목동신시가지 6·9·13단지 등은 1차 정밀안전진단을 진행 중이다. 은평구 불광동 미성아파트(1988년 준공)는 현장조사를 마치고 1차 보고서를 작성 중이라 이르면 연내 통보가 가능한 상황이다. 이들 단지 역시 설혹 1차를 통과해도 2차 통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단계마다 비용 늘고 신뢰도는 떨어져=새로운 기준에 의한 안전진단 결과가 속속 나오면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송파구청으로부터 사실상 재건축 불가 판정을 받은 올림픽선수촌은 이의신청하고, 여의치 않으면 행정소송도 검토하고 있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재건축 모임(올재모)’ 관계자는 “요약보고서에서 이미 중대한 기술적 오류를 발견했다”면서 “상세보고서를 분석한 후 공개검증을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뢰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나오고 있다. 한 구조기술사는 “안전진단 평가요소에 엔지니어가 주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요소가 많은 건 사실”이라면서 “현재 입찰방식으로는 몇 개 대형 안전진단업체가 대부분의 주요 안전진단 입찰을 따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신뢰성 제고를 위해 제3자 검토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비용 문제도 논란이다. 동부그린의 경우 1차 정밀안전진단을 위해 주민들이 4,000만원을 모금했다. 초대형 단지인 올림픽선수촌은 3억원을 모금했다. 문제는 지자체 예산까지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비용은 1차는 조합이, 2차는 지자체가 부담해야 한다. 동부그린의 경우 지자체가 2차 적정성 검토를 위해 4,000만여원의 예산을 확보해야 했다. 단지가 클수록 조합은 물론 지자체 예산도 늘어나는 구조다.
2차 정밀진단의 속도도 문제다. 동부그린의 1차 정밀안전진단 결과는 지난해 10월 통보됐다. 하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인해 구로구가 2차 안전진단을 발주한 것은 올 3월이다. 지자체 재정 여력에 따라 2차 안전진단에 들어가기까지 상당 기간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탈락한 조합들은 다시 안전진단 비용을 모아야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탈락한 재건축 조합의 가장 큰 고민은 언제 다시 안전진단을 신청하느냐는 것”이라면서 “현재 재건축 안전진단의 광범위한 등급을 좁히거나 대략적으로라도 남은 사용 기한도 안내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관계자는 “그동안 요식행위로 안전진단 등급을 받아두고 무리하게 재건축을 추진한 경우가 줄고 있다”면서 “적정성 검토를 통해 부실한 안전진단은 줄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적정성 검토를 비롯해 현재의 안전진단은 정부 측이 자의적 판단에 따라 재건축을 막아설 수 있다는 취지”라면서 “당분간 신규 재건축 사업지가 사라져 공급 위축이 우려된다”고 말했다./이재명기자 nowligh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