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숙 문화재청장
‘개미도 기어간 자취는 있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흔적이 남는다는 뜻인데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냄새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개미 배 끝의 분비샘에서 만들어지는 화학 물질인 ‘페로몬’의 의사전달 기능은 그 섬세함이 인간의 음성 언어에 견줘 떨어지지 않는다고도 한다.
이달 말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는 ‘조선왕실 화협옹주의 얼굴 단장’전에서 그 개미의 자취가 화제가 되고 있다. 화협옹주(1733~1752) 무덤에서 발굴된 화장품 12건 중 청화백자 칠보무늬 팔각호에 담겨 있는 액체시료에서 황개미종 수천마리가 발견된 것이다. 개미들은 몸통이 분리된 채 식초 성분 용액에 담겨 있었다. 학예연구사들은 ‘동의보감’ 등 다양한 자료를 뒤져봤지만 개미 성분이 화장품으로 쓰인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 다만 개미를 초에 담가 만든 약 종류로, 여드름이나 피부 잡티 등을 진정시키는 데 쓰이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이번 전시에 즈음해 16일 열린 국제학술대회는 프레드릭 르로이 세계화장품학회 학술위원장을 비롯해 한국·중국·일본의 화장품 전문가들이 참석해 18세기 아시아와 유럽의 화장품 문화를 비교하는 값진 자리가 됐다. ‘18세기 조선왕실의 화장품과 화장(化粧) 문화’가 주제였지만, 아름답고 싶다는 인류 공통의 욕망을 문화유산과 연결해 살펴보는 드문 기회로 평가받았다. 어둡고 축축한 고분 발굴이 피부 보호와 미용의 화장품으로 연결되니 학회 분위기에도 화색이 돌았다.
2015년 화협옹주묘 발굴을 주도한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장은 이러한 생활문화에 대한 연구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K뷰티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 화장품 문화는 물론, 한류를 뒷받침할 수 있는 풍부한 사료가 무형 문화유산에 넉넉히 잠재돼 있다는 것이다. 전시와 학술대회를 공동주최한 김영모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도 유구·유물 중시의 문화재 정책에서 삶의 문화로 영역을 확장하는 학문 태도가 미래가치 창조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화협옹주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나로, 영조가 직접 쓴 묘지석에는 효성이 지극하고 성품이 온화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스무살에 홍역으로 요절하니 딸을 끔찍이 여기던 영조는 “한 줄 기록하는데 눈물 열 줄기가 흘러내린다. 아, 슬프구나. 아, 슬프구나”라며 탄식했다. 꽃다운 나이의 옹주가 쓰던 화장품 일습 내용물에는 인체에 해로운 탄산납과 수은이 함유돼 있었다. 2200년 전 진시황 시대부터 창백한 미인을 만드는 일등 공신으로 쓰인 납이 옹주의 명을 재촉했을 수도 있다.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이미 다양한 머리 장식과 화장 장신구가 발굴되는 것을 보면 미모를 가꿔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간의 표현욕구는 시공을 뛰어넘어 영원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개미 유체까지 화장품으로 썼을까. 문화재 발굴에 중독성이 있다는 말이 실감 난다. 개미 하나도 우리를 증명해주는 문화유산은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