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 말이 별로 많지 않은 편이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나의 통신표에는 ‘말없이’ 또는 ‘묵묵하게’라는 내용이 단골처럼 쓰여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검사로 일하고 있지만 법학이 아닌 국문학을 전공했다. 그래서일까. 다른 사람보다 연설문 등의 글을 쓰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누구보다 많은 글을 썼지만 글 또한 말 못지않게 힘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2002년께 프랑스에서 연수하는 동안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에 다녔다. 회보지를 편집하고 간혹 거기에 기고도 했다. 귀국할 때쯤 문득 내 글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거나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두려워졌다. 아마도 어딘가에서 ‘말빚과 글빚’의 중요성에 대해 읽었던 후가 아닌가 싶다. 이후 글을 쓰는 게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언론사의 요청으로 두달째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내가 쓴 글이 세상에 나간다고 생각하니 글을 쓰는 게 더욱 고민스럽다. 딸은 “아빠가 쓴 글 읽는 사람 얼마 없으니 편하게 쓰면 될 것 같아요”라고 위로하지만 몇 사람이 읽든 내 이름을 걸고 나가는 글은 늘 조심스럽다. 내 글에 달린 몇 개 되지 않는 댓글에도 신경이 쓰인다.
최근 한 연예인이 악성 댓글로 고통받다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인터넷 댓글이 낳은 비극이자 온라인상에 만연한 혐오문화가 몰고 온 불행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악플의 폐해를 막기 위한 여러 건의 청원이 올라왔다. 많은 사람이 이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국내 포털사이트 뉴스에 달린 댓글은 하루 평균 약 86만개. 이 중 악플의 비율이 80%에 이른다고 하니 매일 약 69만건의 악플이 쏟아져 나오는 셈이다. 댓글 숫자도 놀랍지만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높은 악플의 비율에 새삼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누군가를 비하하고 혐오하고 욕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일상화된 듯해 서글프고 가슴이 아프다.
악플은 언어로 남의 가슴을 찌르는 칼이다. 언론들은 ‘한번 찍히면 개미지옥’ ‘얼굴 없는 살인자’라고 악플의 폐해와 고통을 보고한다. 익명성의 장막 뒤에 숨어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악플의 칼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찌르고 벨지 걱정이다.
댓글도 엄연히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댓글에 대해 저작물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짧은 댓글이지만 한번 게시되면 그 파장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글빚을 지지 않도록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할 것이다.
어느 소설가는 ‘글을 쓴다는 것은 제 살을 깎는 것과 같고, 글이란 제 피로 아로새겨지는 것’이라고 했다. 생전에 아름답고 서정적인 말과 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법정 스님조차 입적하시면서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으니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말빚과 글빚을 경계하셨다.
내가 한 말과 글은 다른 일의 원인이 되고 결국에는 결과가 돼 내게 돌아온다. 이는 인과의 당연한 법칙이리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선업을 쌓기도 하고 악업을 만들기도 한다.
입술과 손의 3초가 가슴의 30년으로 남을 수 있다. 말 한마디, 댓글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부르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악업을 쌓을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