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옛날이여! 晝夜(주야)를 모르고 일하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지 그때는 그래도 꿈이 있어 後悔(후회)없는 삶을 살으리라 다짐하며 굽은 일손은 해 지는줄 모르고 허덕이면 햇님은 來日(내일)도 있으니 오늘은 그만 同行(동행)을 하자고 請(청)합니다. 나는 햇님따라 돌아오며 생각한다. 저 햇님 한낮의 그 强烈(강렬)한 힘은 어디에 다 積善(적선)을 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쉬고 싶어 西山(서산) 너머 집으로 向(향)할까. 아마도 내 人生(인생)의 黃昏(황혼)길도 저와 같으리….」
최근 새벽에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어머님이 몇년 전 쓰신 ‘산직동 밭’이라는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 글처럼 1938년생으로 팔순을 막 넘으신 어머니는 과거 새벽부터 밤중까지 억척스레 땅을 일구셨다. 시골에서 힘든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시부모님 봉양과 사회생활에만 전념한 남편에 대한 뒷받침이 우선이었고 5남매 교육과 어려서 열병으로 지적장애가 생긴 둘째 딸의 노후를 위해 고행길을 묵묵히 걸으셨다. 당신 앞에 켜켜이 쌓인 그 힘든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무릎이 완전히 망가져 인공관절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가 폐암을 발견해 수술하신 적도 있다. 마음의 부담은 심장 부정맥이 돼 수십년간 당신을 괴롭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객지에 머물렀던 자식으로서 ‘엄마는 저리 고생하시는데 나는 이렇게 편하게 공부만 해도 되나’ 절로 눈물이 나곤 했다. 언젠가 어머니는 시골의 황금 들판을 같이 거닐자고 하시며 “농사 짓는 게 인생과 꼭 닮았다. 난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당신을 너무 안쓰럽게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으로도 들린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며 학업을 중단한 뒤에도 책과 신문을 가까이하려 노력했다. 한번은 부엌에서 불을 때며 신문을 보다가 시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때 “그냥 놔두세요”라던 남편의 한마디가 평생 고마운 말이었단다. 시집오기 전 별명이 ‘내무부 장관’이었을 정도로 사리분별이 분명했던 어머니로서는 배움에 대한 갈망을 이렇게나마 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어머니가 홀연히 운명하셨다. 탈상을 뜻하는 아버지의 2주기 대상(大喪)을 지내며 “너희 아버지가 꿈에 자꾸 보인다”며 아버지 묘소를 둘러볼 때 “이제 그만 편히 가시오”라고 말씀하신 지 불과 1주일 만이었다. 새벽 2~3시면 일어나 샤워를 하고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곤 하셨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심장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왜 나를 버리시느냐’며 땅을 치고 통곡하며 나뒹굴었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라 회한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이후 꿈인지 생시인지 경황없이 어머니를 선영에 있는 아버지 옆으로 모신 뒤에도 보름여가 지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와 그냥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것인지, 영혼이 있어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등을 고민하며 인생이 너무 허망하다고 느꼈다. 자연스레 사람이 어떻게 편안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을 수 있고 사전에 가족 등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을 잘할 수 있는지, 즉 ‘웰 다잉(well-dying)’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역설적이지만 ‘웰 다잉’이 곧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웰빙(well-being)’과 직결돼 있다는 점도 절감했다.
「子息(자식)들에게서 孝道(효도) 받을 때 떠나는 것이 大福(대복)이니 내가 내몸 勘當(감당)할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祈禱(기도)를 한다. 하루 해가 떴다 지는 것과 같은 우리네 人生(인생)…. 」말년에 고창문화원을 다니셨던 어머니가 남겨놓은 글을 정리하며 본 ‘인생의 끝자락’ 중 한 대목이다.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