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7년 10월25일 굳게 닫혔던 리스본의 성문이 열렸다. 포르투갈과 십자군의 공격 117일 만의 함락. 전투에 참가한 병력과 기간이 상대적으로 적고 짧았기 때문인지 리스본 쟁탈전은 덜 알려졌으나 세계사의 흐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땅의 주인이 정해졌다. 고대 켈트족과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를 거쳐 로마와 수에비(게르만의 일족), 서고트족이 차례로 지배하다 이슬람 무어족이 차지하던 땅이 신생 포르투갈에 돌아갔다. 리스본 일대는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순식간에 이베리아 반도를 집어삼킨 이슬람 왕조가 지배하던 지역. 마침 이 땅을 절실하게 원하는 프랑스 방계 왕족이 두각을 나타났다.
포르투갈 백작령을 세습한 아폰수 1세는 30세가 된 1139년 독립을 선포한 뒤 이슬람 공격에 앞장섰다. 1143년 4촌 형인 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를 물리쳐 독립을 인정받은 그는 고대로부터 전략 요충이던 리스본을 점령해 신생 왕국의 존재를 과시하려 애썼다. 아폰수 1세는 운이 좋았다. 악천후로 2차 십자군의 일부가 배편으로 아폰수 1세 지역을 들어온 것. 영국 6,000여명, 독일 지역 5,000여명에 저지대(벨기에·네덜란드) 2,000여명으로 구성된 북방 십자군 1만3,000여명은 약탈과 포로 처분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7,000여 포르투갈군에 합류했다.
병력 우위(1만5,000명)가 깨진 마당에 피난민까지 성 안에 받아들여 식량난이 가중된 무어인들은 조건을 걸어 항복하고 말았다. 병사들의 안전한 철수와 주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맹세했던 기독교 군대는 점령과 동시에 약속을 깼다. 전리품을 둘러싸고 십자군끼리 살육전까지 일어났다. 십자군 일부는 성지로 떠났지만 대부분은 리스본에 눌러앉았다. 포르투갈 왕국의 명성이 알려지고 십자군도 이익을 챙겼다. 가장 많은 수가 참전한 영국 출신의 과실이 컸다.
포르투갈 교구의 주교도 영국 십자군에서 나왔다. 왕실 혼사를 통해 굳어진 두 나라의 관계는 자유무역협정의 원형으로 꼽히는 영국과 포르투갈의 메수엔 조약(1703년)까지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성기의 프랑스군을 괴롭혔던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포르투갈 저항군과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지원군도 리스본을 근거지이자 배수진으로 삼았다. 리스본 점령 872년, 포르투갈의 깃발이 날려도 특정국가와 특수관계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영원한 우방이란 동서고금 어디서든 존재하지 않는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