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너희 나라로 가"...다인종 도시 뉴욕마저 '증오의 소용돌이'

■혐오 봉인 푼 트럼프...갈라지는 美 사회
무슬림·유태인·흑인 등 대상
뉴욕 인종차별·증오 범죄 급증
올들어 33%나 늘어 323건
민주당 非백인 의원들 겨냥
트럼프, 인종차별적 발언 여전
내년 대선 앞두고 분열 심화

지난 19일(현지시간) 이집트 출신 미도 무라드는 부인과 함께 쌍둥이 아이들에게 줄 겨울옷을 사기 위해 뉴욕 브루클린 베이릿지 86번거리에 있는 할인매장 티제이맥스에 들렀다. 히잡을 쓴 부인과 함께 대기 줄에 서 있던 그에게 갑자기 한 백인 여성이 다가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Go back to your country)”고 소리쳤다. 이 여성은 무라드가 스마트폰으로 촬영하자 “내 얼굴에서 치워라”며 욕설과 함께 위협을 가했다. 매장 직원들은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았다. 무라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트럼프 광신도에게 공격을 당했다”고 적었다.

이슬람교 무슬림 부부를 대상으로 벌어진 이 같은 증오범죄에 뉴욕시가 시끌시끌하다. 다양한 인종과 신념, 배경을 가진 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뉴욕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데 대해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뉴욕 시의회와 앤드루 구나아즈 뉴욕주 상원의원이 직접 수사를 촉구하면서 뉴욕경찰(NYPD) 증오범죄 태스크포스(TF)가 이 사건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심각한 증오범죄에 대해 “모든 뉴요커의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뿌리가 깊고 역사도 오래됐다. 다인종 도시인데다 진보 성향의 젊은 층이 많은 뉴욕은 다민족 포용 현상이 두드러지지만 최근에는 이 뉴욕에서도 인종차별 증오범죄가 급증하면서 사회 주요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24일 뉴스위크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초까지 뉴욕에서 발생한 증오범죄는 32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43건에 비해 33%나 늘었다. 증오범죄란 소수 인종이나 민족, 노인, 동성애자 같은 사회적 약자 층에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뉴욕시의 증오범죄 피해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유태인(170건)이며 동성애자(42건)와 흑인(31건) 등도 주요 대상이다. 미국에서 다인종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퀸스카운티(76.4%)를 포함해 뉴욕 지역의 다인종 비율이 70% 안팎에 달하는 데도 증오범죄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점에서 불안감이 크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증오범죄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발생하는 증오범죄의 59.5%가 인종 관련 사건이고 20.7%가 종교, 15.9%가 동성애 같은 성과 연관돼 있다.

뉴욕의 중심지인 맨해튼도 예외는 아니다. 현지방송인 PIX11에 따르면 올해 50세인 동성애자 앤서니 돌치는 매일 맨해튼 거리에서 동성애 혐오증과 인종차별주의 등에 반대하는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다. 맨해튼 9번가와 57번 거리가 만나는 곳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던 그는 지난 6일 길을 지나던 한 남성에게 “게이나 되라”며 공격을 받았다. 그는 돌치의 피켓을 빼앗아 부수고 욕설을 했다. 뉴욕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가운데 “침팬지, 아프리카로 돌아가라(CHIMP go back to Africa)”는 말을 백인에게서 들은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의 타깃이 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오른쪽) 의원 등이 지난 6월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네모 사진) /AFP연합뉴스

뉴욕 도심은 아니지만 업스테이트 뉴욕에서는 지난달 10세와 11세 여학생들이 통학버스에서 흑인 여학생을 때리고 흑인을 비하하는 ‘N으로 시작하는 말’로 모욕했다가 기소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직장인 애리얼 구즈만은 기자에게 “최근 뉴욕에서도 증오범죄에 대한 뉴스가 많이 나온다”며 “미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여유와 포용력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유태인을 상대로 한 범죄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말에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브루클린의 유태교회당에 우유 상자를 던지고 유태인 남성의 모자나 여성의 스카프를 빼앗는 일이 잇달아 벌어졌다. 이 때문에 뉴욕시는 지난달 빌 드 블라시오 시장의 지시로 증오범죄 예방부서를 새로 만들었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뉴욕에서 증오범죄가 증가하는 이유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뉴욕시 증오범죄 예방부서를 총괄하는 데버라 라우터는 “언론에 나온 증오범죄를 모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영향을 주로 꼽는다. 당장 티제이맥스 사건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이 있다. 가해자인 백인 여성이 피해자에게 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7월 트럼프 대통령이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와 일한 오마르 등 민주당 비(非)백인 초선의원 4명을 겨냥해 한 말이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일부 백인들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나 아시아인들을 겨냥해 증오를 쏟아내는 표현으로 쓴다. 뉴욕타임스(NYT)는 “돌아가라” 발언에 담긴 이민자를 배척하는 정서는 16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국가지도자가 인종차별적 뉘앙스를 담은 발언을 토해내니 증오범죄가 자유의 도시인 뉴욕까지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소속 리타 로위 뉴욕주 하원의원은 증오범죄가 뉴욕에서 크게 늘고 있는 데 대해 “트럼프 정부가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 반유대주의의 봉인을 풀었다”고 지적했다.

내년 대통령선거와 탄핵조사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층을 결집하고 백인들의 표를 이끌어내기 위해 인종차별적 언사를 계속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통령이 이를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22일에도 탄핵조사를 거론하면서 자신의 트위터에 “모든 공화당원은 여기서 목격하고 있는 것, 린칭(lynching)을 기억해야 한다”며 인종차별을 연상하게 하는 발언을 했다. 린칭은 남북전쟁 이후 남부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을 불법적으로 처형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대통령이 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종차별적 인식을 바탕에 둔 것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뉴욕에 거주하는 다이앤씨는 “트럼프 대통령의 (소수인종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행복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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