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교 인하대 교수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5)가 비상사태로 취소됐다. 21개국 정상들이 참여하는 국제회의를 국내 정치적 이유로 취소한 것은 국가 이미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에 반발한 중고생들이 시위를 주도했으나 얼마 안 가 100만명의 시민들이 가세해 거리를 메웠고, 방화·약탈·폭력이 난무하면서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다.
필자는 통상협상과 APEC 등 국제회의 참석차 칠레를 자주 방문했다. 칠레는 우리나라의 첫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이다. 한·칠레 FTA 협상 당시 칠레는 전 세계 매장량의 40%를 가진 구리의 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시장주의 경제정책 확립으로 남미 국가 중 확실한 모범국가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소득분배 개선과 공공인프라 확충에 실패했다. 올 5월 칠레 방문에서도 남미의 다른 국가처럼 심각한 빈부 격차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비싼 현지 교통비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과 좌파 정부의 복지 포퓰리즘으로 칠레 경제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첼 바첼레트는 2006~2010년과 2014~2018년 칠레 대통령이었다. 집권 1기에는 고교생들이 교육제도 개혁에 반발해 시위를 벌였지만 말년에는 칠레 지진 수습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집권 2기에는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과감한 복지정책으로 결국 칠레 경제를 망쳤다.
칠레판 트럼프로 불리던 세바스티안 피녜라 우파 후보가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정권이 교체됐다. 피녜라 정부는 복지병과 재정수지를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 정책으로 설정했고, 올 1월에 이어 10월에도 지하철 요금 인상을 단행했다. 하지만 다수 국민에게 50원의 요금 인상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국민들의 경제 현실을 무시한 개혁정책은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칠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와 더불어 소득배분이 가장 열악한 국가고, 성장 사다리 체계가 부실한 국가다. 상위 1%가 소득의 26.5%를 차지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5,000달러지만 노동자의 절반이 한 달에 70만원 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다.
국민 다수가 가톨릭 신자로 자녀가 많다. 하지만 학비는 우리나라 못지않고 지하철·통신 등과 같은 공공요금은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높다. 서울지하철 기본요금이 1,250원인데, 산티아고 요금은 1,300원대다. 최근 십여년 사이 도시 재개발로 산티아고 저소득층은 변두리 지역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고 지하철 요금은 노동자 소득의 30%나 될 정도로 부담이 되고 있다.
앞으로 유사한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 재정여건을 무시하고 복지제도를 확대한 결과 이제 공공요금 인상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약 좌파정부의 집권이 계속됐다면 공공요금 인상보다는 재정부실을 방치하는 방향으로 갔을 수 있다.
그럼에도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현 집권세력의 처세와 입방정이었다. 50원 요금 인상에 100만명의 인파가 시위를 하는데, 피녜라 대통령은 고급 식당에서 손자 생일파티를 벌였고 경제장관은 요금 인상이 싫다면 조조 시간을 이용하라고 말해 기름을 끼얹었다. 심지어 대통령의 동생인 내무장관은 시위자들을 폭도로 규정했으니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도시빈민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번 뿌려진 선심복지를 없애는 것은 정치적 명운에 영향을 줄 정도로 격렬한 반발을 직면하게 된다. 인구 절벽과 경제성장률 하락 등으로 정부 재정수입은 뻔한데, 무상급식·무상의료·구직수당 등 수많은 선심복지 인플레이션으로 우리나라의 상황도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 칠레의 비상사태를 반면교사로 우리의 복지정책을 지속가능하게 수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