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당신도 '서울 염소'입니까?

‘어릴 때 큰집으로 심부름을 가곤 했어. 작은 목장을 하던 큰집에 우유 얻으러 가고, 형들도 보러 가고. 산모퉁이를 돌면 묵은 밭 같은 평지가 나오는데 거기 염소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거야. 그냥 쇠꼬챙이에. 염소는 동그라미 안에 있어. 쇠말뚝과 동그라미 중간쯤에 앉아 입을 우물거리면서…… 그 모습이 어린 눈에도 무척 인상적이었어. ‘바깥 풀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구나. 불쌍하다.’ 그런데 커서 보니까 내가 딱 그 염소야. 목줄 길이가 회사 가는 거리인 거지. 밖은 녹색, 안은 회색. 까만 염소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거야. 자기가 끈에 매인 줄도 모르고.’ (오인숙, ‘서울 염소’, 효형출판, 2015년 펴냄)


사진작가 오인숙은 남편의 삶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 치열한 프로그래머 세계에서 남편은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가 더 좁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고투한다. 생계라는 말뚝에 넥타이로 목줄을 매고 까만 양복을 입은 채 먹이를 구하러 가는 남편은 흡사 ‘서울 염소’다. 밤이 오면 하루치의 모욕과 슬픔이 치통과 복통으로 변해 서울 염소의 몸을 들이받는다. “남편은 치통으로 밤새 뒤척이다가 ‘돈’이라는 미끼를 한번 문 이상 입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바늘을 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가슴을 쳤다.”

그러나 오 작가의 카메라가 비단 먹고사는 아귀다툼에 짓눌린 우울한 가장의 편린(片鱗)만 담은 것은 아니다. 쌍둥이 딸의 웃음, 그토록 많은 수모와 아픔을 견뎌낸 평범한 남편의 장엄한 순간들이 살아 있다. ‘서울 염소’ 책표지에는 야근 후 늦게 퇴근한 듯 넥타이를 풀며 어린 딸들이 방문에 걸어둔 메시지를 응시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있다. 진작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 어린 딸들은 제법 의젓하게 이렇게 적어두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오늘도 서울 염소들은 말뚝 밖으로는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당신이 기꺼이 스스로 묶여 있음으로 인해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우주는 안전하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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