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딸 'AS'에 등골 휘어요"…황혼육아 떠밀리는 노년층

[대한민국 엄마를 응원해]
"힘든줄은 알지만 믿고 맡길곳 없어"
돌봄공백 가정 96%가 조부모 도움
노후생활은커녕 육체·정신적 부담
정부, 공공보육 인프라 구축 등 외면
황혼육아 부작용 해소책 마련 시급

서울 서초구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손주돌봄 교실에 참여한 조부모들이 영유아 발달 이해에 관한 교육을 받고 있다. 서초구는 조부모들에게 손주 돌봄 교육을 제공하고 돌봄 수당까지 지급하는 ‘손주 돌보미’ 교육을 지난 2011년 전국 지자체 최초로 도입했으며, 4개월 이상 24개월 이하 손자녀를 한 명 이상 키우는 조부모들에게 영유아 육아법과 소통법 등 육아에 필요한 손주 돌봄 교실을 25시간에 걸쳐 제공하고 있다. 교육은 격월 단위로 진행된다. /사진제공=서초구

#. 정확히 2년 전 고향인 부산을 떠나 아들 부부가 사는 서울 영등포구로 올라온 김영란(64)씨. 그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다른 도시로 이주를 감행한 것은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 좀 돌봐달라”며 눈물로 호소한 탓이었다. 맞벌이인 아들 부부는 당시 18개월 아들이 하나 있지만, ‘맞벌이 다자녀’ 가정에 가점이 밀려 인근 어린이집에 줄줄이 낙방(?)하자 김씨에게 SOS(긴급 구조신호)를 쳤다. 낯선 서울로 올라가면 아는 사람도 없고 하루 종일 손자만 돌봐야 할 상황이었지만 부부 중 한 사람이 일을 그만두면 대출금을 갚을 여력이 없다며 매달리는 아들을 모른척하기 어려웠다. “손자는 정말 예쁜데 아침부터 애들 퇴근 때까지 맡아주려니 밤에 잠들 때는 허리에 어깨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남편이 ‘그만 봐주고 부산 내려오라’고 하지만 아들네 사정을 뻔히 아니까 결혼할 때 보태주지 못한 것, 몸으로 갚자 하고 있죠.” 김씨는 “덜컥 몸이 아플까 봐 제일 무섭다”며 “이 아파트 단지 노인정에 가 ‘손자 보러 와 있다’하니 저 동 누구도, 이 동 누구도 손주 몇 년 돌보다 중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며 두려워했다.

#.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중견기업 과장 정승민(38)씨는 2년 넘게 아이의 등·하원부터 식사 챙기기 등을 맡아줬던 친정엄마 한순자(69)씨가 지난달 갑자기 위암 1기 판정을 받아 심각하게 퇴사를 고려하고 있다. 정씨의 어머니는 건강검진 과정 중에 암을 초기에 발견해 적출이 가능한 양호한 상태로 확인됐다. 그럼에도 정씨는 친정엄마가 암 투병을 하게 된 이유가 아이를 봐달라고 했던 자신의 요청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자꾸 자책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서른 넘어서 아이를 낳은 저도 애 키우는 것이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닌데,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라며 엄마에게 기댄 것이 너무 후회된다”면서도 “워킹맘인 딸이 힘들까 내색 안 하시는 엄마를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등 조부모가 손자·손녀를 돌보는 일명 ‘황혼육아’가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황혼육아에 떠밀리는 노년층이 원하지 않는 육아를 부담하며 겪는 육체적·정신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저출산과 돌봄 공백의 해결책으로 내세운 공공 아이돌보미 사업이 여러 문제로 정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개별 가정이 육아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상황이 이어진다는 비판도 나온다.

보건복지부가 육아정책연구소에 의뢰해 진행한 ‘2017 어린이집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집 등·하원 전후로 부모 외의 인물이 돌봐주는 경우는 전체의 28.1%를 차지했는데 이 중 조부모가 95.9%에 달했다. 유형별로는 외조모인 경우가 56.8%로 가장 많았으며 친조모가 38.8%로 뒤를 이었고 친조부와 외조부는 각각 1.4%에 그쳤다. 결국 할머니가 자신의 딸이나 아들을 위해 육아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맞벌이하는 여성이 자신의 시어머니보다 친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 ‘결혼한 딸 사후서비스(AS)를 해주느라고 등골이 휘어진다’는 말도 노년층 사이에 공공연하게 돈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전국보육실태조사-가구조사 보고’에 따르면 혈연에 양육지원 서비스를 하는 조부모 중 정기적으로 현금을 받는 경우는 38.5%에 불과했다. 비용은 100만원 이상이 31.6%로 가장 많았지만, 22.8%는 50만~59만원 이하, 14.7%는 30만~39만원 이하라고 답해 평균 금액은 70만3,000원에 그쳤다. 민간 아이돌보미 시급이 1만~1만2,000원에 턱없이 못 미치는 금액이다. 아들 부부를 위해 황혼육아를 하고 있는 김영란씨처럼 많은 노년층이 직장과 육아라는 이중고를 겪는 자녀를 대신해 종일 손자나 손녀를 돌보면서도 제대로 된 양육비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경제적 대가는커녕 고된 육아를 떠맡으며 건강까지 나빠지는 경우도 허다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8 미래에셋 은퇴 라이프 트렌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체력적 한계(55.6%, 중복응답)였다. 지난 2003년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4년간 일주일에 9시간 이상 손주를 돌본 60세 전후 노인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의 심장병 발병률은 55%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렇듯 상황이 심각한데도 정부는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수년 전 정부는 돌봄 공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지원 아이돌보미 사업에 조부모도 지원 대상으로 넣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공공 보육 인프라 구축 대신 오히려 황혼육아를 장려하는 것이냐’는 반발에 부딪혀 논의 자체를 접었다. 서울 서초구를 비롯한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현안 해결을 위해 육아교육을 이수한 조부모에게 일정 기간 수당을 지급하는 등 ‘손주돌보미’ 특화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공공 보육 인프라 구축이 선결 없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나 다름없다. 앞서 소개한 현황 데이터 역시 보육의 대상인 ‘어린이집 원아’를 위한 설문조사에 불과해 실제 황혼육아를 수행하는 장년층이 겪는 어려움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황혼육아에 대한 공식 입장이나 관련 정책은 따로 없다”며 “다만 황혼육아를 담당하는 이들을 위해 지역별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조부모 양육 코칭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간접적으로 (황혼육아의) 부작용을 해소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이수민·김연하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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