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골담길 정상에서 내려다본 동해.
강원도 강릉역에서 내려서 차로 50분. 동해시 묵호동 논골담길에 도착하니 옹기종기 모인 판잣집 사이로 짠 내 스민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일상의 번잡함을 잊게 해주는 한적한 바다를 찾고 싶었다.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마주하니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이 일었다.
논골담길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관광객이 한때 번창했던 묵호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통장이 없던 시절, 주머니에 돈다발이 넘치도록 가득 차 거리의 개들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습니다.”
한때 흥했던 동네에서 흔히 내려옴 직한 이야기로 지영미 문화관광해설사가 입을 열었다. 지난 1941년 묵호항이 개항한 뒤 묵호항 뒤로 자리 잡은 논골마을은 돈을 벌려고 모여든 2만여명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네였다. 명태와 오징어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한 항구마을이었다. 하지만 수온이 상승하고 어족이 마르기 시작하며 부자가 될 꿈에 부풀었던 청년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지금은 500여명의 주민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비탈길에 촘촘하게 지어진 집들 사이를 걷다 보면 식목에 자리를 내준 빈집 터가 이따금 보인다.
흙이 바닷물에 항상 젖어 있어 논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제 쓰일 일 없는 장화들이 마을을 장식하고 있다.
논처럼 질척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 논골마을이다. 과거 마을 꼭대기에는 생선을 말리는 덕장이 있었고 주민들이 밤새 잡은 생선을 대야에 담아 언덕을 오르내리며 흘린 바닷물에 땅이 항상 질퍽했다고 한다. 지금은 시멘트로 포장돼 바닷물 머금은 흙의 질퍽함을 느낄 수는 없지만 길을 걷다 보면 이제는 사용할 일이 없어 화분으로 쓰거나 장식물로 변신한 장화들을 볼 수 있다. 지 문화관광해설사는 “남편과 아내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사는 동네였다”며 “장화가 마을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공중화장실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골목골목마다 사람들이 떠난 빈자리를 메운 것은 형형색색의 벽화들이다. 그래서인지 인적 드문 마을에는 외롭고 스산한 분위기가 흐르지 않는다. 수많은 벽화마을 중에서도 논골담길의 벽화가 특별한 것은 그림에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10년 빛바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동해문화원은 마을 예술가, 대학생 봉사자를 모아 벽화를 그리기로 했다. 보기 좋고 사진에 예쁘게 나올 그림들로 벽을 채우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대신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잊혀가는 이야기를 벽에 새기기로 했다.
논골담길 벽에 생선을 나르는 아버지, 뒤쫓는 딸, 대야를 이고 걷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마을의 벽면에 가득 새겨진 그림은 만선의 기쁨으로 행복에 찬 어부와 생선을 손질하는 부녀자들, 연탄을 들고 부모 뒤를 쫓아가는 어린아이들이다. 행락객들에게 말을 거는 듯한 생생한 벽화다. 지 문화관광해설사는 “벽화가 칠해진 후 논골마을을 ‘담화(談話)마을’이라 칭하기도 한다”며 “그림만 보아도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올 5월 이곳을 강소형 잠재 관광지로 선정하기도 했다.
논골담길에는 총 4개의 코스가 있다. 논골1길·논골2길·논골3길과 등대오름길로, 코스에 따라 최소 15분에서 최장 30분 정도 소요된다. 길이 길지 않고 구석구석 예쁜 카페들이 숨어 있어 발길이 이끄는 대로 즐기기에 좋다.
논골담길 정상에 있는 묵호등대.
벽화를 따라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정상에서 작은 등대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묵호등대 앞마당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동해와 묵호항, 그리고 논골마을의 아름다운 정취가 한눈에 들어온다. 낮에는 알록달록한 지붕과 파란 바다가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경을 즐길 수 있고 밤에는 따뜻한 차 한잔으로 몸을 녹이며 시커먼 바다 멀리 별처럼 빛나는 오징어잡이 배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1968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묵호등대 앞마당에는 이를 기념하는 ‘영화의 고향’ 기념비가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름다운 풍광 덕에 최근에는 드라마 ‘마더’ ‘찬란한 유산’ 등도 이곳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다음달이면 KTX 강릉선이 동해시까지 연장 운행된다. 기차는 논골담길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묵호역에도 정차할 예정이다. 고요한 마을은 이제 사람들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묵호등대 옆에는 내년 7월 완공을 목표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공사가 한창이다. 도째비골 비탈면에 먹거리·휴식공간 등을 마련해 관광의 편의성을 높인다고 한다.
/글·사진(동해)=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