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인문학] '폭발'보다 '절제'가 예술을 만든다

■예술가, 그 빛과 그림자- 예술가적 기질
이연식 미술사가
교회·군주·귀족에 굽실거렸고
시민혁명후 시장에 사로잡혔지만
예술가들 그래도 부르주아에 저항
잭슨 폴록·백남준·마르셀 뒤샹
파격 속에서도 색과 선의 질서 의식
다른 세상 꿈꾸게 만든 예술가 모델

예술가적인 기질은 어떤 것일까. 한때는 필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미술대를 다니던 시절,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며 술을 퍼마시고 세상 온갖 고민은 죄다 짊어진 것처럼 열변을 토했다. 그건 기성질서에 대한 거부와 반항의 몸짓이었다. 아니, 반항을 빙자한 무절제와 방종이었다. 아니, 예술가로서의 길을 찾아 헤매던 청년기의 열망이었다. 예술가 지망생은 ‘예술가적’ 제스처를 종종 절망적으로 되풀이한다, 예술가처럼 살면 예술가가 될 거라는 믿음으로. 청년은 기성질서를 거부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지만 실은 스스로 따를 모델을 찾느라 필사적이다. 그런데 청년이 흉내 내는 예술가 모델은 사회가 예술가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모델이기 십상이다.

지난날 청년 예술가 지망생의 어깨에 앉아 있던 망령들의 이름은 대충 이렇다. 잭슨 폴록, 백남준, 마르셀 뒤샹. 지망생들은 이들 세 사람이 이루는 삼각형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폴록은 충동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모델로, 백남준은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예술의 새 지평을 연 인물로, 뒤샹은 예술 자체의 위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인간으로 기억된다.

예술가 흉내와 예술가로서의 삶은 다르다. 예술가는 작업할 도구와 공간을 확보해야 하고 스스로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때때로 에너지를 폭발시키면서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냉철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카라바조는 온갖 폭력적인 사건에 휘말렸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질렀다. 그렇다면 카라바조는 늘 분노를 주체 못하는 모습으로 살았을까. 실제로 카라바조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파격적이었다. 밑그림을 꼼꼼하게 그리고 나서 색을 칠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었지만, 카라바조는 밑그림 없이 대담하게 형상을 화면에 펼쳐놓았다. 작업하는 리듬도 불규칙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닥에 펼쳐놓은 화폭에 페인트를 흘리는 잭슨 폴록. 1950년

하지만 20세기에 폴록이 했던 것처럼 화면에 물감을 질질 흘리고 뿌릴 수는 없었다. 심지어 폴록조차, 얼핏 되는 대로 퍼부어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색과 선이 이루는 질서를 깊이 의식하며 리드미컬한 화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주의 깊게 작업했다. 안료를 세필에 묻혀 양피지에 바르던 예술가, 나무로 된 패널에 유화물감을 한 겹 한 겹 칠해서 씌우던 예술가, 에나멜페인트를 바닥에 질질 흘리며 뿌리는 예술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차분하고 냉정해야 했다. 폭발보다는 절제가 예술을 만든다.

한때 예술가들 사이에서 ‘부르주아적’이라는 말은 경멸의 표현이었다. 부르주아의 가치에 영합한다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이런 결기는 낭만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의 낭만주의 예술은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조력을 내세웠다고 흔히 도식적으로 정리되는데, 정작 낭만주의 이래 예술가의 처지는 자유로워진 만큼이나 위태로워졌다. 과거에는 교회와 귀족과 군주에게 굽실거리며 주문을 받았지만 이들의 주문이 끊기자 다른 주문자를 찾아야 했다. 예술가는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군주와 귀족을 밀어내고 새로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시민계급의 손에 맡겨졌고, 예술은 냉혹한 시장의 법칙에 사로잡혔다. 예술가는 과거처럼 무릎을 꿇고 절을 하지만 않을 뿐, 부르주아 시민계급을 섬기며 이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런 처지에서도 예술가들은 부르주아에 저항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 속에서 태어난 다다(Dada) 이래 1960년대를 메운 저항의 물결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부르주아를 불편하게 만드는 예술을 내세웠고, 예술과 아름다움을 둘러싼 관념 자체를 뒤흔들었다. 그런데 그런 온갖 시도를 부르주아의 미감은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심지어는 주어진 조건을 온순하게 받아들이는 예술가는 ‘예술가답지’ 않고, 새롭고 특이한 것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존재이유라는 관념만 점점 강해졌다. 이런 판에는 거부와 반항의 제스처조차 ‘예술가적’ 역할 놀이가 되고 만다.

약 1만7,000년 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라스코 동굴벽화.

예술가는 자신이 디딘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인류가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은 선사시대의 동굴 그림이다. 이문열이 1970년대 말에 발표한 중편소설 ‘들소’는 예술의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올라가 예술과 예술가의 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된 그림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펼친 이 소설에서 예술은 집단이 이룬 권력의 체계에서 밀려난 인간의 선택지였다. 예술과 권력은 함께할 수 없으며, 권력과 결합하거나 권력을 위해 봉사하려 하면 타락한다, 또 특정 이데올로기의 대변자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 소설가의 주장이다. ‘들소’는 현대적인 관념을 과거에 투영한 이야기다. 선사시대 미술에 대해 계속돼온 연구는 동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예술적 자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동굴 그림은 샤먼이 일종의 접신(接神) 상태에서 본 이미지일 수도 있다. 샤먼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동물을 어지러울 만큼 겹쳐 그렸다. 요컨대 선사시대의 동굴 그림은 오늘날 짐작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지식과 영감을 전승하는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화가가 샤먼의 지시를 받아 그렸을 수도 있고, 샤먼 자신이 화가였을 수도 있다. 적어도 선사시대의 예술가는 이문열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권력에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양날의 칼이다. 샤먼은 중개자다. 초자연적인 위력과 연결돼야만 존재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연결이 약해지거나 사라지면 샤먼은 추방되거나 살해당한다. 그런 점에서는 먼 과거의 샤먼이나 오늘날 예술가의 처지는 통하는 데가 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해야 한다. 남을 꿈꾸게 하는 자가 반드시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