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머니' 정지영 감독 "관객에 다가가기 위해 작정하고 재밌게 만들었다"

"론스타의 진실은 웃고 넘기지 않고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어야"
'양민혁 검사' 役 조진웅 통해
묵직한 스토리 재미있게 풀어
실제·허구 섞여 재탄생했지만
금융자본의 어두운 단면 전해
소외된 시민들에 도움됐으면

영화 ‘블랙머니’ 정지영 감독. /이호재기자

영화 ‘블랙머니’ 정지영 감독./이호재기자.

영화 ‘블랙머니’ 정지영 감독. /이호재기자

정지영(73·사진) 감독은 사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고발해 왔다. 그의 영화 문법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한결같이 직설적이다.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 1985(2012)’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리얼리즘적인 서사로 풀어간 그의 작품들은 때로 불편할 정도로 진지했다. 그래서 요즘 관객들에게는 외면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매각 사건을 모티프로 한 그의 신작 ‘블랙머니’는 무겁기만 했던 그의 필모그래피에 새로운 획을 그은 작품이다. 우선 재미있다. 고뇌에 찬 주인공 대신 ‘경제 무식자’인 막무가내 양민혁 검사(조진웅 분)를 통해 묵직한 스토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간다. 개봉 5일 만에 누적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흥행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에게 ‘이제 흥행 감독에 이름을 올리는 것 아니냐’라고 묻자 정 감독은 담담하게 질문을 받았다. “요즘 관객들은 제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요. 이번 영화가 재미있다면 조진웅 배우가 맡은 양민혁 검사 캐릭터 때문일 거에요. ‘부러진 화살’을 찍으면서 캐릭터가 재미있어야 영화가 산다는 것을 깨닫고 ‘블랙머니’에서는 작정하고 이 캐릭터에 공을 들였죠.”

일흔 살이 넘도록 자신의 뚜렷한 색깔을 지켜 온 감독이 관객을 위해 자신의 스타일을 수정하고 이것이 성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강단에 서다가도 ‘나는 영화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오고, 관객의 외면에도 오로지 영화로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애써 온 그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노(老)감독에게는 영화를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영화 ‘블랙머니’

영화는 ‘블랙머니’는 ‘막프로’라고 불리는 검사 양민혁이 우연히 스타펀드(론스타)의 대한은행(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이라는 거대 금융 비리 사건의 실체를 접하고 이를 파헤치는 과정을 담았다. 어려운 소재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모르는 양 검사 캐릭터를 내세워 관객들을 편안하게 이끌어 간다. 러닝 타임이 흐를수록 금융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을 마주하게 되는 양 검사와 함께 관객들은 각성하게 된다.

스타일은 바꿨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정 감독의 신념과 뚝심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영화는 그냥 ‘재미있다’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대중에게 다가가면서도 영화를 보고 나면 숙제가 남아 있는 듯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론스타 사건을 소재로 삼은 데 대해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사건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다가 지금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진 론스타 사건이 그의 영화를 통해 이렇게 다시 관객들에게 회자되는 것을 보면 그의 시도는 성공인 셈이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를 거쳐 한국 사회가 극심한 혼돈에 시달리면서 한동안 영화계에서는 통쾌함과 웃음으로 현실을 잊게 만드는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러한 흐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기생충’ ‘조커’ 등 경제적 불평등이 초래한 비극을 그린 작품들이 관객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블랙머니’ 역시 이러한 작품들과 결을 같이 한다. 정 감독은 “‘조커’ 같은 불편한 영화에 관객들이 공감하는 것은 자기 안에 조커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라며 “조커가 왜 자기 안에 숨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영화가 바로 블랙머니”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탄생했지만 ‘블랙머니’를 관통하는 본질적인 메시지는 바로 ‘공정’이다. 정 감독은 “금융자본주의는 정보를 알고 있는 일부 기득권자와 권력자들이 그들만의 세계를 확고히 하는 것”이라며 “평범한 소시민들은 복잡한 경제 용어로 설명되는 경제 이슈를 잘 알지 못하니 더욱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소외된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그는 “공정하다는 말을 힘 있는 사람이 평가해서는 안된다. 대중은 그들의 의견에 함몰돼 공정하지 않은 걸 공정하다고 믿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71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177만 명이다. 손익 분기점을 넘길 것이 확실시되는 지금, 400만~500만 이상 관객이 들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현실적이면서도 꿈을 담은 대답이 돌아왔다. “뭐 하긴. 빚 갚죠. 그래야 또 영화 만들 수 있겠지요. 그게 좋아요.”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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