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신약개발 사업은 시작할 때부터 여러 난관을 예상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꾸준히 투자해왔습니다. 혁신적인 신약 개발의 꿈을 이룹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2016년 6월 경기도 성남 SK바이오팜 생명과학연구원을 찾아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20년 넘도록 혁신과 패기, 열정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며 이 같이 말했다. 3년 뒤 SK바이오팜은 독자 개발한 혁신 신약 ‘엑스코프리(성분명: 세노바메이트)’의 FDA 품목승인을 받으며 그 꿈을 이뤘다. SK바이오팜은 지난 1993년부터 중추신경계 질환 신약을 개발해 온 SK 바이오·제약 사업 부문이 2011년 분사한 기업이다. SK는 SK바이오팜 지분 100%를 소유했다.
엑스코프리는 이미 1~3개 뇌전증 치료제를 복용중이지만 부분 발작이 멈추지 않는 성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치료제다. 미국, 유럽 등에서 2,400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 엑스코프리는 모든 용량에서 위약 투여군 대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발작 빈도를 낮춘 것으로 나타났다. SK바이오팜은 엑스코프리에 대해 “감마 아미노뷰트릭 산(GABAA) 이온 채널의 양성 알로스테릭 활성화와 전압개폐성 나트륨 전류의 차단을 통해 신경 세포의 반복적인 발화를 감소한다”고 설명했다.
SK그룹의 신약개발 역사는 선대 최종현 회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93년 최 회장이 대덕연구원에 관련 팀을 꾸렸다. SK케미칼의 김대기 박사가 신약 개발에 실패했다고 보고했을 때, 최종현 회장이 “부작용을 미리 발견해서 그것까지 해결하면 더 완벽한 신약이 될 수 있다”며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격려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8년 9월 취임한 최태원 회장은 선대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2030년 이후 바이오를 그룹의 중심축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세우고 꾸준한 투자를 이어나갔다. 2007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때도, 신약개발 조직은 지주회사 직속으로 뒀다. 신약개발은 단기 실적 압박보다는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돈 먹는 하마’라는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도 최 회장은 투자를 이어나갔다.
SK바이오팜은 엑스코프리를 개발하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2,000개 이상의 후보 물질을 탐색했다. 19년간 쌓인 자료만 230만 페이지에 달한다. 2008년 임상 1상, 2015년 임상 2상, 지난해 임상 3상을 완료했다. 2011년 분사 이후 SK바이오팜이 8년 간 연구개발비로 투입한 금액은 5,000억원에 육박한다.
조정우 SK바이오팜 사장은 “이번 승인은 SK바이오팜이 뇌전증을 포함해 중추신경계 분야 질환에서 신약 발굴, 개발 및 상업화 역량을 모두 갖춘 글로벌 종합 제약사로 거듭나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며 “연구개발 역량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감격적인 성과”라고 소감을 밝혔다.
엑스코프리는 내년 2분기 중 미국 전역에 출시된다. 유럽 지역은 아벨 테라퓨틱스를 통해 출시될 계획이다. SK바이오팜은 아벨 테라퓨틱스와 지난 2월 유럽 시장을 대상으로 6,000억원 규모의 판권 이전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현재 글로벌 뇌전증 치료제 시장 규모는 약 61억 달러(약 7조1,826억원)인데, 이 중 미국 시장이 54%인 33억달러(약 3조8,858억원)를 차지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약 2만 명이 매년 새롭게 뇌전증으로 진단 받고 있으며, 뇌전증 환자의 약 60%는 뇌전증 치료제를 복용해도 여전히 발작이 계속되고 있다. 엑스코프리가 첫 국산 블록버스터 의약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SK바이오팜은 엑스코프리의 매출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약 개발을 지속할 방침이다. 지난 26년간 집중해온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 뿐 아니라 항암제 개발에도 착수했다. 기업공개(IPO)에도 파란 불이 켜졌다. 지난 10월 유가증권 시장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한 SK바이오팜은 내년 초 국내 증시에 데뷔할 것으로 보인다. 당초 5조원 정도의 기업가치를 예상했으나, 뇌전증 치료제의 시장 규모가 급성장하며 6조원을 넘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