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택의 세상보기] 아세안과 협력은 사람에서부터

정석인하학원 이사장
차이 인정하고 비공식협의 중시
아세안 매년 1,000회 넘게 회의
고급 두뇌와 인적 교류 강화해야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일 처리는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국제사회에 알려져 있다. 이는 동남아의 독특한 문화인 무샤와라 무파카트(musyawarah mufakat), 즉 대화에 의한 합의 방식 때문이다. 공식적인 규칙으로 강제하지 않고 비공식적인 협의를 중시하며, 차이를 인정하고 가능한 한 충돌을 피해 의사결정을 한다.

유럽연합(EU)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지침(directive)을 회원국에 내려보내고 3만2,000명의 직원이 이를 집행, 감독하는 데 비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 사무국은 직원 300명이 회의준비 연락 업무 등을 하고 있어 마치 ‘우체국’ 같다는 비판도 있다.

EU에서 영국이 탈퇴하는 브렉시트(Brexit) 문제가 불거지고 독일과 다른 EU 회원국들의 마찰이 커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아세안 방식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늘고 있다. 특히 아세안을 주축으로 하는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이 이달 초 타결되면서 더욱 주목됐다. 흔히 중국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RCEP는 아세안의 제의로 태동했으며 수석대표의장도 인도네시아다. 역사·문화·경제 체제 및 수준이 매우 다른 15개국을 같은 협정의 틀에 묶을 수 있었던 데는 차이를 받아들이고 충돌 없는 합의를 추구하는 아세안 방식이 작용했다. 정치·사회적 갈등 요인은 있지만 아세안은 현재 세계에서 안정적 성장을 이루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아세안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5%를 차지하고 있지만 한국 경제에서의 중요성은 그보다 훨씬 크다. 올해 10월까지 한국 수출 중 24.7%가 중국, 17.7%는 아세안으로 향했다. 이는 시장 규모가 다섯 배 이상 큰 미국·EU보다 많은 수치다.

인구 6억5,000만명의 아세안과의 협력에서 주안점을 둬야 할 목표는 사람이다. 26일 한국과 아세안 정상들이 채택한 공동비전 성명에서도 사람 지향, 사람 중심의 한·아세안 공동체를 구축하기로 했다. 인적 교류를 확대하는 방법 중 하나는 국제회의를 통한 것이다. 아세안에서는 정상급·장관급·실무자급까지 매년 1,000회가 넘는 회의가 개최돼 교류의 폭을 넓히고 국제감각과 능력을 배양하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 정례적인 국제회의가 적은 한국은 아세안이 역외국가와 함께 각 분야에 걸쳐 개최하는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류 채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사는 아세안 사람은 52만명으로 중국 국적 동포 다음으로 많다. 한국인과 결혼한 아세안 사람도 6만명이나 된다. 이들을 따듯하게 감싸고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은 아세안과의 협력을 촉진함과 더불어 성숙한 다문화사회를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아세안 출신 국회의원과 국제적인 당구선수가 배출되기도 했지만, 그 정도의 주목까지는 받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가진 재능을 잘 펼치고 꿈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청년들의 교류와 유학생의 역할도 중요하다. 한국에는 5만명 정도의 아세안 유학생이 있고 그중 대부분은 베트남 학생들이다. 국제하계대학 코스에서 외국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같은 아세안 국가들이 많이 참여했다. 정규학위 과정으로도 확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고급인력 간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의 첫 번째 재임 때인 2007년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센터(ERIA) 건립을 제안해 설립 및 운영을 지원해왔다. 한국도 베트남 전략개발연구소와 미얀마 개발연구소를 지원했는데, 자금력은 뒤지지만 실제 경제개발 경험을 가졌다는 강점을 살려 아세안 두뇌들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한다’는 인도네시아의 속담처럼 아세안과의 협력은 사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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