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괴물’로 불리는 글로벌 특허관리회사(NPE)들이 ‘메이드 인 코리아’ 특허를 사들여 삼성·LG전자(066570) 같은 한국 기업을 공격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홀대받던 특허를 NPE가 사들여 소송 무기로 사용해온 사실이 확인된 것으로 국내 기업들이 특허괴물의 공격 등 글로벌 지식재산권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특허 관리·활용을 더 전문화하고 고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 기사 3면, 본지 11월6일자 1·3면 참조
2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미국 NPE인 매그너차지(Magnacharge LLC)가 지난해 국내 발명가로부터 배터리 관련 특허를 사들여 삼성·LG전자에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 특허는 ‘비접촉식 배터리팩 충전장치’로 지난 2002년 국내에서 출원됐다. 이후 2008년 패밀리 특허로 미국에서도 등록됐다. 매그너차지는 지난해 8월 특허권을 손에 넣자마자 2개월 뒤인 10월 미국 델라웨어 지방법원에 LG전자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매그너차지가 문제 삼은 것은 LG전자의 무선충전 관련 제품군이다. 매그너차지는 소장에서 “(우리는) 해당 특허에 대한 권리·소유권·이익을 넘겨받은 양수인이자 소유자”라며 “모든 해당 특허 침해에 대한 구제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매그너차지는 올해 4월 같은 법원에 삼성전자(005930)와 하만을 상대로 스마트폰·갤럭시워치 무선충전 패드 등이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T모바일·파나소닉·소니·앤커 등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잇따라 피소됐다.
NPE가 소송을 위해 다양한 국내 특허를 매입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지식재산권 전문기업 윕스에 따르면 크로스텍캐피털은 2009년 국내 반도체 회사의 특허를 500여건 매입했으며 ‘컨버전트 IP’ 역시 2012년 국내 전자기업의 특허 80여건을 사들였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특허를 사들인 뒤 관련 제조업체에 소송을 걸어 수익을 올리는 것이 전형적인 NPE의 전략”이라며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권경원기자 nahere@sedaily.com
제값 못받던 특허, 결국 헐값에 팔려…국내 기업에 부메랑으로
[탐사S 특허괴물, 끝나지 않은 전쟁]
<하>갈 길 먼 특허 생태계
출원수수료 미국보다 10배 낮아
박리다매로 무늬만 특허 줄줄이
세계4위 출원국 불구 관리 소홀
“기술 모방해도 사후보상하면 끝”
대기업, 특허침해 인식 구태 여전
아일랜드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 라이선스 전문기업인 솔라스OLED. 올해 5월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전자, 삼성전자 북미법인 등 3개사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며 미국 텍사스 동부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문제가 된 특허는 플렉시블 터치센서로 미국 특허다. 솔라스OLED는 관련 특허를 일본의 카시오 등으로부터 사들였는데 이 중에는 국내 특허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허업계의 한 관계자는 “특허관리회사(NPE)는 특허를 매입할 때 국가별 관련 특허도 패밀리로 묶어서 사들인다”며 “특허 소송은 승소 가능성이 높은 국가 법원에 제기하고 이를 무기로 로열티 협상을 할 때 국가별 특허를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수치는 집계되지 않고 있지만 NPE들은 국내 특허의 상당수를 헐값에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기업들이 관심을 갖지 않던 국내 특허가 결국 우리 기업을 옥죄는 부메랑으로 날아올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매년 21만건의 신규 특허가 출원된다. 상표나 디자인권 등을 포함하면 연간 50만건의 지식재산권(IP)이 출원된다. 국내총생산(GDP)과 인구 100명당 기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특허 출원 건수가 많다. 양적으로는 세계 4위(연간 출원기준) 수준의 특허 강국으로 성장했지만 특허에 대한 인식이나 관리·활용 등에 있어서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다. 지난 9월 특허 200만호 시대가 열렸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국내 특허시장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대기업들의 특허등록 현황이다. 대기업들은 국내 특허보다 해외 특허 취득에 주력하고 있다. 28일 서울경제신문이 삼성·LG전자의 최근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양사의 해외 특허등록 건수가 국내 특허등록 건수를 평균 2~3배 웃돌았다. 삼성전자의 경우 2018년 국내에서 2,055건, 미국에서 6,062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2017년에는 국내에서 2,703건, 미국에서 6,072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2013~2016년에도 해외 특허등록 건수가 국내 특허등록보다 평균 2,000건가량 많았다.
LG전자는 매년 특허등록 현황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적 특허등록 추이를 보면 삼성전자와 비슷하다. LG전자의 2018년 국내 특허등록(이하 누적)은 2만6,898건, 해외 특허등록은 5만5,172건이다.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특허 취·등록이 많은 양사의 특허 현황으로 볼 때 다른 기업도 비슷한 추이를 보일 것으로 분석된다.
대기업들이 국내 특허보다 해외 특허 등록에 더 주력하는 이유는 뭘까. 글로벌 기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내 특허와 해외 특허의 질적 수준과 경쟁력 차이 때문이다. 변리사 출신인 국내 대형 로펌의 한 특허 전문 변호사는 “한마디로 국내에는 쓸 만한 특허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뛰어난 특허도 간혹 있지만 출원되는 대다수가 무늬만 특허라는 얘기다. 특허 소송시장 자체도 협소하고 특허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국내 기업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소송전을 벌이며 국내 법원보다 미국 법원을 주요 전장으로 삼은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지적이다.
특허업계에서는 국내 특허 생태계가 설익은 가장 큰 이유로 특허출원 과정을 꼽는다. 미국은 건당 특허출원 수수료가 1,000만원이 넘는데 한국은 최고 100~150만원 수준에 그치고 있다. 특허출원 수수료가 낮다 보니 특허의 질을 신경 쓰기 어렵고 결국 특허도 제값을 받기 어려운 질 낮은 특허만 양산된다. 국내 특허의 질이 낮으니 이를 번역해 출원하는 해외 특허로 진행하는 소송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성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변리사의 특허출원 수수료가 너무 낮다”며 “반도체나 통신기술에 대한 특허출원도 120만원, 간단한 실용신안도 120만원이라는 것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변리사들이 특허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과 비용도 안 되는 수준”이라며 “박리다매로 대량 수주해 찍어내듯이 특허를 생산하는 것이 국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과거보다는 줄었다지만 대기업이 협력업체인 중소기업의 특허를 침해하는 관행도 여전히 남아 있다. 고의적인 침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특허를 바라보는 기업들의 인식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일단 돈이 되면 특허 침해 사실을 무시하고 사후에 보상하면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보다 기존에 있던 기술을 모방해 쉽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적극 대응하기 어렵다. 중견업체를 운영하는 A 대표는 “협력업체가 대기업에 문제 제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밝혔다.
드물지만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특허 침해 공방도 일어난다. 미생물 이용 악취제거 전문업체인 비제이씨는 2004년부터 현대자동차와 기술탈취 공방을 벌이고 있다. 비제이씨는 특허를 낸 휘발성 유기화합물 제거 기술을 협력사 관계였던 현대차가 가로챘다고 주장한다. 중소기업기술분쟁조정위원회와 특허청은 현대차의 기술탈취로 인정했다. 반면 법원에서는 현대차의 손을 들어준 상태로 대법원 최종심이 진행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국내에서 좋은 특허를 개발하는 데 소극적이다. 중소기업이나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스타트업들은 보유 특허도 턱없이 적지만 정책자금 조달이나 정부 보조금을 받는 수단으로 한정하고 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백서(2018년)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의 41%가 특허권 없이 창업할 정도로 지식재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김정곤·권경원기자 mckid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