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3법·데이터3법·민식이법’등의 통과가 예상됐던 정기국회 본회의가 자유한국당의 모든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 신청 영향으로 파행을 겪은 29일 더불어민주당(왼쪽)은 국회 로텐더홀 앞 계단에서, 자유한국당은 본회의장 안에서 서로를 탓하며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연합뉴스
데이터 3법은 또 한 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야가 선거법·공수처법 문제로 강하게 충돌하며 이제 20대 국회 내 통과조차 불확실해진 상황이다. 법안 처리가 1년 늦어지면 국제 시장에서 10년을 뒤처지고 100년의 미래 먹거리를 잃게 되는 급박한 데이터 산업의 현실 앞에서, 국회는 왜 다시 거대한 흐름의 물꼬를 막게 된 것일까.
개별 법안을 심사하는 ‘법안심사소위원회’를 보면 그 문제가 보인다. ‘777분’. 지난 1년간 국회가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을 논의하는데 사용한 시간이다. 법안별로 평균을 내면 259분에 불과하다. 걸핏하면 장외투쟁을 나가는 바람에 소위는 열리지도 못했고, 국회로 돌아와서도 여야는 소위 여는데 게으름을 피웠다. 열더라도 ‘만장일치’ 관례에 법안 통과는 번번이 막혔다. 일 안 하는 국회, “이제는 뜯어고쳐야 한다”지만 정작 의원들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9일 밤 국회를 나서며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한국당은 올해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 ‘필리버스터’를 통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오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과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저지하기로 했다./연합뉴스
◇정쟁에 볼모 잡힌 민생법안=자유한국당은 지난 29일 한 편의 인질극을 벌였다. ‘선거법을 내려놔라. 민식이법이 내 품 안에 있다. 선거법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민식이법을 돌려 보내주겠다’는 내용이다. 실제 나경원 원내대표는 “선거법을 상정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법안에 앞서 민식이법 등을 먼저 상정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 통과시켜줄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나 원내대표는 여론이 부담스러웠는지 민식이법 뿐만 아니라 다른 인질들도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5개 법안에 대해서만 패스트트랙을 보장해달라. 나머지 법안은 다 처리하자고 분명히 민주당에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관련도 없는 선거법·공수처법 협상에 민생법안을 인질로 잡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 된 법안에 정쟁 뿌린‘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당이 ’실시간 검색어 제재법‘을 정보통신망법과 함께 처리해야 한다며 법안소위 개최를 가로막은 것이다. ’실시간 검색어 조작‘을 방지한다는 이 법은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의 내용, 즉 정보통신망법 내 개인정보 관련 내용을 모두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이관한다는 사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한국당 소속의 김성태 과방위 간사는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정보통신망법 처리도 안 된다며 생떼를 부렸다. 결국 정보통신망법은 전체회의는 물론 법안소위도 넘어가지 못했다.
각 법안별 법안소위 개최 이력에는 이러한 ‘정쟁의 흔적’이 잘 드러난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지난해 11월 15일 발의, 같은 달 27일 전체회의에 상정된 후 2019년 4월 1일 법안소위에 처음으로 상정됐다. 그러나 이후 9월 27일 소위가 다시 열리기까지 반년 간 ‘깜깜 무소식’이었다. 바로 패스트트랙 충돌 이후 한국당이 장외투쟁에 돌입한 시기다. 신용정보법도 마찬가지다. 개인정보호법과 같은 날 발의돼 그해 12월 27일 전체회의에 상정됐지만, 3월 17일 법안소위가 열린 후 8월까지 5달 가량 소위원회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의원들이 밖으로 나간 국회는 휑했고 법은 뒷전이었다.
데이터 3법 주요 내용
◇‘무용지물’ 일하는 국회법=각 상임위별로 법안소위를 월 2회씩 의무적으로 열도록 하는 ‘일하는 국회법’이 6월부터 시행됐다. 결과는 암담했다. 10월까지 이 사항을 준수한 상임위는 교육위원회 1곳에 불과했다.
현재 국회 상임위는 특별위원회를 제외하고 총 17개다. 그 아래에 법안을 심사하는 소위원회가 25개 있다. 하지만 법이 시행된 6월부터 규정을 준수한 관련 소위는 전체 3분의 1에 불과했다. 특히 7월에는 이행률이 36%에 그쳤고, 8월에는 8%까지 떨어졌다. ‘무용지물’이란 질타가 이어졌다.
신용정보법과 개인정보보호법도 마찬가지다. 신용정보법은 지난 3월과 8월, 10월에 1번씩 열렸고 나머지 3번은 모두 11월에 열렸다. 개인정보법은 4월·9월·10월·11월에 열렸다. 월 2회 개회 의무가 지켜진 건 1년 중 11월 한 달 뿐이었다. 전체 10번의 소위 중 절반인 5번이 11월에 몰려 ‘벼락치기’라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법안심사소위는 수석전문위원이 법안의 내용과 쟁점을 설명하면, 이후 의원들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찬반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어떤 법안의 경우 내용이 너무 많아 수석전문위원이 설명하는 데만 소위 시간의 절반을 할애하기도 한다. 게다가 법안이 처음부터 완벽할 리는 없다. 의원들이 불완전한 법을 조금씩 수정해가는 과정에서 완결성을 갖춘다. 또 법안소위는 원내 7개 정당은 물론 개별 의원들의 다른 생각을 하나로 모아 갈 기회이기도 하다. 소위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인 이유다. 그런데 개인정보법은 1년에 4번, 신용정보법은 6번 논의되는 데 그쳤다. 데이터 3법의 불발은 ‘일 안 하는 국회’의 방증이기도 하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노웅래 위원장이 29일 오후 국회 과방위 소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데이터 3법 가운데 온라인상 개인정보보호 규제 감독 권한을 개인정보보호위원회로 변경하는 정보통신망법의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연합뉴스
◇‘장판파’의 지상욱과 채이배=법안소위와 상임위는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한다. 국회법에는 없지만 의원들끼리 타협과 합의를 이루자는 암묵적인 룰이다. 다만 이런 만장일치 관례로 인해 한 명의 반대자만 있어도 법안 통과는 오랜 시간 지연될 수밖에 없다.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이 개인정보법을 반대한 게 단적인 사례다. 지 의원은 지난 21일과 25일 연이어 열린 법안소위에서 개인정보법 23조 제2항을 들어 법안 통과를 반대했다. 국가나 지자체, 또는 공공단체장이 신용정보집중 기관에 정보 제공을 요청한다면 그 권한이 남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이원욱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28일 “정무위원회에서 한 명이 반대해서 (법안 통과가) 안 됐고, 과방위는 일정조차 안 잡힌다“며 기자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했다.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지난 29일 채이배 의원이 법사위원회에 올라온 개인정보보호법을 두고 “아무리 원내대표 합의 사항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급하게 법을 처리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며 제동을 걸었다. 원내대표는 물론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원회에서도 논의를 끝마친 사안이었다.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채 의원 페이스북
이에 한 민주당 관계자는 “장판파의 장비도 아니고 ..”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한 명의 의원이 다른 의원들의 합의 사항을 가로막는 게 홀로 수백 명의 적군을 저지한 장판파의 장비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한 수석전문위원은 “상임위 법안소위 한 명만 반대해도 법안이 처리되지 않는 관행은 깰 필요가 있다”며 “그 관행을 깨지 않는 한 법안 처리는 20대는 21대든 어떤 국회를 막론하고 쉽사리 이뤄지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지만…“글쎄”=문희상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은 뒤늦게야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지만 의원들의 반응은 신통찮다. 문 의장은 연내에 ‘일하는 국회법’ 패키지안을 발의해 국회 임시회의 일정을 상시화하고 상임위·법안소위 일정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의장에게 부여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당 역시 국회혁신특위를 열어 ‘상임위·법안소위 의무화’를 제안했다. 다만 의원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한 민주당 초선 의원은 “국회 보이콧도 정치 활동의 일부”라며 난색을 표했다. 최근 몇 차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중진뿐만 아니라 다수 초선들도 이같은 혁신안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게다가 패스트트랙 정국 이후 총선 국면으로 접어들면 더더욱 국회혁신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김인엽기자 insid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