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김혜순 詩, 세계적 미술가의 작품 되다

40년간 텍스트 작업 매진한 홀저
첫 한국어 문학 구절 작품 선보여

제니 홀저 ‘당신을 위하여’.640.1x12.7x12.7cm 크기의 로봇ㅣLED사인이 작동하는 작품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그리하여 숨/ 그러자 숨/ 그 다음엔 숨/ 이어서 숨/ 그래서 숨/ 그렇게 숨/그리고 숨/ 그대로 숨…(하략)”

용수철 흔들리는 차르르 소리를 내며 길이 6.4m의 로봇 LED 기둥이 아래로 내려왔다 다시 위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그 움직임에 아랑곳없이 제 속도로 움직이다 불현듯 방향을 바꾸고 문득 멈추기도 하는 글은 시인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펴냄) 중 한 구절이다. 움직이는 구절은 이뿐 아니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거울 저편의 겨울’이 흐르기도 하고 에밀리 정민 윤의 ‘우리 종에 대한 잔혹함’의 시구도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적인 미술가 제니 홀저(69)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커미션 프로젝트로 작업을 시작해 3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당신을 위하여’가 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공개됐다. 홀저는 1970년대 후반 역사와 정치적 담론, 사회문제를 주제로 자신이 쓴 경구들을 뉴욕 거리에 게시한 이래 40여 년간 줄곧 텍스트 작업을 선보인 개념미술가다. 지난 1990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을 대표하는 첫 여성작가로 선정됐고, 그 해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뉴욕과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등 유수의 미술관과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 같은 공공장소에서 작업을 선보였다.

홀저가 한국어로 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혜순, 한강, 에밀리 정민 윤 외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호진 아지즈 등 현대 문학가 5명의 작품을 택해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글로 보여준다. 미술작품인 동시에 문학이며 눈으로 소리를 듣는 듯한 효과를 주는 작품이다. 약 16m 높이 천장에 매달린 사각기둥은 서울관 내 전시장인 서울박스 공간에 맞춰 구현된 로봇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속도로 위아래로 움직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문구들은 역사적 비극과 사회적 참상, 재앙을 경험한 이들의 생각을 추적하며 소통과 회복을 이야기한다.

제니 홀저의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 포스터 연작. 안상수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이 협업한 작품으로, 홀저의 포스터가 한국어로 제작된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제니 홀저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작품은 이뿐이 아니다. 1층 티켓박스 옆에는 홀저의 초기 작품 ‘경구들’(1977~79)과 ‘선동적 에세이’(1977~82) 포스터 1,000여 장이 붙어 있다. 각기 다른 색상으로 구현한 12종 포스터와 작품에서 발췌한 문장 240개를 인쇄한 것이다. 이 대규모 설치작품은 안상수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들의 협업을 통해 탄생했다. 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석조 다리 위에는 작가가 선정한 11개의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을 영구적으로 새긴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 작품 중 ‘당신을 위하여’와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은 국립현대미술관 후원회가 구입해 미술관에 기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발전에 뜻을 모은 경영인들을 중심으로 지난 2011년 발족한 후원회는 매년 뉴미디어 작품 수집을 지원하고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프로젝트는 세계적으로 왕성한 활동 중인 제니 홀저가 최초로 한국어를 활용한 신작을 선보이는 기념비적인 전시”라며 “미술관 공간에 맞춰 특별히 커미션 제작된 작품이라 세계 미술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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