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기 한미약품 회장
이번엔 라이선스 인(기술수입)이다. 최근 국내 제약사는 물론 바이오벤처들이 수조원 단위의 라이선스 아웃(기술수출)에 성공하고 있는 가운데 한미약품은 조용히 미국 유망 바이오기업의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다. 국내 바이오제약 기업 중에서도 최다 파이프라인(30개)을 보유한 회사의 사뭇 다른 행보에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미약품이 4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물질은 미국 나스닥 상장 기업인 랩트 테라퓨틱스(RAPT Therapeutics)의 CCR4 경구용 면역항암제다. 경구용 면역항암제 중에서도 면역을 억제하는 ‘조절 T세포’와 이 세포의 이동에 관여하는 단백질인 CCR4를 표적으로 하는 약은 이번이 처음이다. 랩트는 현재 고형암 대상 글로벌 임상 1·2상과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 병용 임상을 진행 중이며 임상 2상 일부 결과를 내년 상반기 중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미약품은 랩트에 초기 계약금 400만 달러(47억원 가량)와 향후 개발 단계별 성공보수 5,400만 달러(642억원 가량)를 지급하며 상용화에 따른 이익을 분배하기로 합의했다. 라이선스 인은 라이선스 아웃의 반대 개념으로 원천 기술의 개발은 랩트가 했지만 제품화까지의 임상과 글로벌 허가는 한미약품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신약에 대한 권리를 나누게 된다. 통상 도입한 회사는 약속된 계약 금액을 개발사에 주고 세계 시장 일부 또는 전부의 판매 수익을 독점하는 경우가 많다. 한미약품의 경우 이번 계약으로 후보물질이 향후 상용화 되면 한국과 중국(대만·홍콩 포함)에서의 독점적 권리를 확보하게 된다.
한미약품의 이번 결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려면 성공 가능성이 있는 신약 후보물질이나 신약기술을 들여와 파이프라인부터 다양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세창 한미약품 대표도 이번 결정에 대해 “이번 협약을 통해 한미약품의 파이프라인이 더욱 견고해졌다”면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1973년 바이오신약 연구원 5명으로 시작한 한미약품은 오늘날 매출 1조원 규모의 대형 제약사로 거듭났다. 업계에선 특히나 연구개발(R&D) 투자로 유명하다. 최근 10년간 1조원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이는 연간 매출 대비 평균 15% 이상이다. 그 결과 현재 보유 중인 혁신 신약 후보물질이 총 30여개로, 국내에서 가장 많다. 개발분야도 당뇨·비만 등 대사성 질환부터 항암, 희귀난치성질환, 자가면역질환까지 다양하다. 신약 파이프라인의 절반 이상은 사노피, 제넨텍, 테바, 스펙트럼, 아테넥스 등 글로벌 제약사와 파트너십(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빠른 상용화가 추진되고 있다. 국내에서 1호로 라이선스 아웃에 성공한 곳도 한미약품이다. 물론 이는 “신약 개발은 내 목숨과도 같다”는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평생 지론 덕분에 가능했다. 한미약품은 1호 글로벌 신약 탄생을 위해 전력 질주 중이다. 2021년 혁신신약을 상용화한 뒤 매년 1~2개의 혁신 신약을 발매하는 것이 목표다. 가장 기대가 되는 후보 물질은 호중구 감소증 치료제 ‘롤론티스’다. 호중구 감소증이란 항암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으로 백혈구의 50~70%를 차지하는 호중구가 항암치료로 비정상적으로 감소하면서 세균 감염에 취약해지는 질병이다. 한미약품은 2012년 롤론티스를 미국 스펙트럼에 기술수출했는데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 바이오의약품 시판허가(BLA) 절차에 들어갔다.
미국 제약사 아테네스가 진행하고 있는 경구용 항암제 ‘오락솔’의 임상3상 결과 발표도 앞두고 있다. 한미약품은 2011년 아테넥스에 오락솔의 기술을 이전했고 올초 연구 초기 결과에서 치료가 어려운 혈관육종 환자들을 대상으로 신속한 반응 등 고무적 결과를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올해 두 건의 기술반환으로 주가가 출렁이기도 하는 아픈 경험을 겪었지만 업계가 한미약품에 거는 기대는 크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바이오시밀러 위주의 제약시장에서 자체 연구개발에 힘쓰는 제약사는 돋보일 수밖에 없다”면서 “곧 결과로서 그동안의 노력을 입증되지 않겠냐”고 전했다.
/이주원기자 joowonmai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