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사진) 전 대우그룹 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재계 2위 그룹 총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재계에서는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김우중 전 회장을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1.5세대 창업가로 분류한다.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성공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으며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성공을 거뒀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김 전 회장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으며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를 연 이후 김회장이 이끈 대우는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창구가 됐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으며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만든다. 대우전자는 이후 ‘탱크경영’ 등 품질을 앞세운 마케팅으로 국내 전자업계에 이름을 알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김 전 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회장의 부친이 대구사범 은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김 전 회장을 각별히 챙겼으며 사업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3저 호황을 타고 해외 진출에 성공하며 대우를 세계에 알렸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길 정도로 해외 경영에 매진했다.
하지만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가져왔다.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을 빚으면서 자금 지원을 받지 못했다.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 전 회장은 ‘수출론’을 집중 부각했지만 관료들과의 갈등으로 되레 개혁 대상으로 내몰렸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으며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유동성 위기에 내몰렸다. 특히 당시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온 이후 유동성 위기는 한층 심화됐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김 전 회장측은 추징금을 아직 납부하지 못했다. 김 전 회장은 말년에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하며 명예회복에 나섰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후였다. 김 전 회장은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는 경제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