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인문학] '할배' 그리운듯...400살 '할매소나무' 시름시름

■나무로 읽는 역사- 경남 합천 화양리 '부부소나무'
강판권 계명대 교수·사학
마을 뒷산 '할배' 송충이 습격 이겨내지 못해 운명 다하고
밭 근처의 '할매'는 치마 입은것처럼 아름다운 자태지만
병에 걸린듯 줄기 하나 완전히 말라버려 안타까움 자아내

경남 합천 화양리 마을 밭에 자리잡은 400살의 ‘할매 소나무’. 치마를 두른 듯 풍성한 모습을 한 소나무의 자태가 아름답다.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천연기념물 제189호 소나무가 살고 있다. 나이는 400살 정도다. 소나무는 마을 아래 밭 근처에 살고 있다. 가을에 소나무를 찾아가면 푸른 배추와 소리쟁이가 솔잎처럼 싱그럽다. 동네 사람들은 이곳의 소나무를 ‘할매 소나무’라고 부른다. 모습이 마치 치마를 입은 할머니를 닮았기 때문이다. 할매 소나무는 여자라는 뜻이다. 할매 소나무가 있다면 당연히 ‘할배 소나무’도 있어야 한다. 동네 사람들이 할배 소나무라고 부르는 소나무는 뒷산에서 만날 수 있다.

필자는 화양리 소나무를 아주 많이 찾았다. 화양리 소나무를 돌아가신 충북 괴산 삼송리의 왕소나무만큼 자주 찾은 것은 부부 소나무의 슬픈 이야기 때문이다. 나무와 얽힌 이야기는 나무의 문화에 아주 중요하다. 특히 마을 사람들의 삶과 관련한 이야기는 나무의 생태학에서 귀중한 자료다. 화양리 소나무는 소나무 동호인들이 우리나라 소나무 중에서 최고로 꼽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갖춘 존재다. 소나무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지난 1970년대에는 송충이가 창궐했다. 그래서 농촌의 학생들은 걸핏하면 오후에 송충이를 잡으러 인근 산으로 갔다. 학생들은 나무젓가락으로 송충이를 잡아 가져간 병에 넣었다. 화양리의 소나무도 이 시절에 송충이의 습격을 받았다. 송충이가 솔잎을 모두 먹어버리면 소나무는 광합성을 하지 못해 죽어간다. 마을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소나무에 올라가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송충이를 잡았다. 마을 사람들의 고생 덕분에 마을 앞의 소나무는 생명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더욱이 마을 사람들의 헌신 덕분에 소나무는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러나 뒷산에 살고 있던 소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미처 송충이를 모두 잡지 못해 고사하고 말았다.


화양리 마을 뒷산에 있는 할배 소나무. 주위 나무들의 그늘에 가려진 모습이 세월의 흐름을 보는 듯 하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천연기념물 소나무에 제사를 올린다. 소나무가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목(神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소나무에 제사를 올릴 때 반드시 뒷산의 할배 소나무에 먼저 제사를 지낸다. 뒷산의 할배 소나무가 살아 있는 할매 소나무의 남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뒷산에 살고 있는 할배 소나무의 생전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돌아가신 할배 소나무 옆에 자식 소나무가 한 그루 살고 있다. 자식의 모습은 할매 소나무와 달리 가지가 많지 않아 남성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필자는 화양리 소나무를 만나러 갈 때마다 할배 소나무를 먼저 찾는다. 얼마 전에도 찾았다. 필자가 이곳 천연기념물 소나무를 다시 찾은 것은 태풍 링링이 덮친 9월6∼8일 사이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천연기념물 제541호)가 쓰러진 모습을 직접 보고 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속으로 아무 탈 없이 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병이라도 걸리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면서 찾아갔다. 이곳 소나무가 살고 있는 마을은 워낙 골짜기가 깊어 찾아가는 길도 만만찮다.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길도 좁고 경사가 심해 아예 찾아갈 수조차 없다. 그래서 한 번 찾아가려면 큰맘을 먹어야 한다.

마을 앞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고개를 소나무 방향으로 돌리자마자 ‘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주차장에서 소나무를 내려 보는 순간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한참 동안 소나무를 멍하니 바라봤다. 소나무의 달라진 자태를 보니 7월 건강하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모습이 떠올랐다. 필자는 차마 소나무 곁으로 가지 못하고 뒷산의 할배 소나무를 만나러 갔다. 할배 소나무를 만나러 가는 동안에도 혹시나 쓰러지지 않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동안 찾았을 때까지는 죽은 채로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혹 태풍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발걸음이 할배 소나무에 가까워지자 필자의 마음도 덩달아 뛰었다. 할배 소나무 앞까지 가니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가 산길을 가득 메웠다. 이곳의 밤알은 할배 소나무에 제사 지낼 때 올리는 제물이다. 밤나무 사이로 할배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필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모습에 감사했다. 할배 소나무 가까이에 가서 보니 놀랍게도 어린 층층나무 한 그루가 할배 소나무 가지와 붙어 있었다. 필자는 그 모습을 보고 층층나무에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할배 소나무가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층층나무였기 때문이다. 할배 소나무의 뿌리 근처 밑동은 불에 탄 듯 새까맣다. 누군가가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까맣게 탄 것은 할배 소나무의 깊은 상처일 것이다.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할매 소나무를 만나러 갔다. 조심스럽게 소나무 근처에 가서 자세하게 건강상태를 살펴보니, 줄기 하나가 완전히 말라버렸다. 할매 소나무는 필자가 오기 전부터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던 것이다. 할배 소나무를 그리워하다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말라버린 줄기가 하늘로 치솟은 할매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니 설움이 북받쳤다. 누구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소나무의 삶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수척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지친 소나무를 뒤로하고 차 안에서 거울에 비친 필자의 모습을 보니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색깔도 반백을 훌쩍 넘어버렸다. 십몇 년 전 처음 할매 소나무를 만났을 때 음료수를 앞에 두고 큰절을 올렸던 기억이 새로워 그나마 눈물을 흘리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강판권 계명대 교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