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의 최근작 ‘도달’(왼쪽)과 ‘흐름’.
부산이 ‘한국의 마이애미’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는 온화한 기후의 해안도시라는 것 외에 스위스의 바젤, 홍콩과 더불어 세계 최정상급 아트페어인 ‘아트 바젤’이 열리는 3개 도시 중 하나라는 점에서 문화적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간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서울과의 문화 격차를 보여왔지만 최근 몇 년 새 부산시립미술관에 이어 부산현대미술관이 사하구 을숙도에 개관하고, ‘아트부산’ 등 신생 아트페어의 약진과 함께 국내 최정상 화랑인 국제갤러리가 부산에 분점을 내는 등 명실상부한 ‘한국의 마이애미’로 주목받고 있다. 내년에 입주 예정인 해운대 엘시티 등 대규모 주상복합건물이 연달아 들어섰고, 부산 지역민들뿐 아니라 국내외 부호들의 ‘세컨드 하우스’로 부산이 주목받은 데다 지역의 문화적 수준 상승이 예술에 대한 수요를 낳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세계적 조각 거장 안토니 곰리의 최근작 ‘낙하’(왼쪽)와 ‘탐지’.
영국 출신의 세계적 조각 거장인 안토니 곰리의 국내 첫 개인전이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 내 이우환공간에서 개막해 내년 4월19일까지 열린다. 1994년 터너상 수상작가이기도 한 곰리는 자신의 몸을 석고로 떠서 인체상을 만든 최초의 작가로 유명하다. 벌거벗은 몸을 주물로 뜨는 과정을 마음의 수련과정에 비유했고 대자연이나 공공장소에 인물상을 세워 사람들에게 관계성을 일깨웠다. 이 같은 점은 작가 이우환이 추구하는 예술과도 교차하는 지점이기에 미술관 측은 ‘이우환과 그 친구들’의 첫 기획전으로 이번 전시를 마련했다. 지난 3일까지 영국 런던의 로얄아카데미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등 곰리의 최근작은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한 인체를 특징으로 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20여 점은 국내 처음 선보인 것으로 3차원을 이루는 격자 투시선을 토대로 만든 형태가 공간에 놓인 인간의 몸을 재정의해 보여준다.
이곳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16일부터 일본 여성작가 시오타 치하루의 대규모 개인전 ‘영혼의 떨림’도 열린다. 시오타는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 작가로 선정돼 선보인, 탯줄과 자궁 속을 떠올리게 하는 대규모 붉은 실 설치작업을 비롯해 대표작 110여점을 내놓았다. 도쿄의 모리미술관이 기획해 61만명이 다녀간 화제의 전시로, 부산에 이어 중국·대만·호주 등지의 순회전으로 이어진다.
작가 패트릭 블랑의 ‘수직정원’이 자칫 삭막할 수 있는 부산현대미술관 건물에 생명력을 더했다.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작품으로 공간 전체가 구성된 부산현대미술관 내 카페.
을숙도의 부산현대미술관은 도심에서 떨어져 있지만 연일 관객으로 북적인다. 일등공신은 세계적 아티스트그룹 랜덤 인터내셔널의 설치작품 ‘레인룸’ 때문이다. 100㎡ 공간에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사람이 들어서는 순간 수만 개의 인체 온도감지 센서가 작동해 절대 사람은 젖지 않는다. 눈앞에서는 비가 내리고 소리와 냄새까지 가득하지만 촉각만 비를 벗어나는 초현실적 경험을 하게 한다. 지난 2012년 런던에서 처음 전시되던 날 1,000명이 다녀갔고 이후 뉴욕·상하이·LA 등지에 순회전으로 소개돼 화제를 일으켰다. 입소문으로 부산·경남뿐만 아니라 서울 등 타지에서도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다. 하루 관객을 540명으로 제한하고 있어 내년 1월27일까지인 이 ‘우중산책’을 즐기려면 관람 예약은 필수다.
또한 이곳 부산현대미술관은 1층 카페를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설치작품으로 꾸미고 있으며 지하 1층에는 어린이 움직임에 최적화한 어린이도서관을 두고 있다. 기획전 ‘시간 밖의 기록자들’에는 싱가포르 작가 호 추 니엔, 오스트리아의 요한 루프, 한국의 노재운·남화연 등 무게감 있는 작가들이 참여해 디지털 문명 가속화 시대의 역사 인식 태도를 이야기한다.
옛 고려제강 공장을 개조한 복합문화센터 F1963 내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개막한 호주작가 다니엘 보이드의 국내 첫 개인전 전경.
국제갤러리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호주 출신 작가 다니엘 보이드의 첫 개인전을 지난 13일 부산점에서 개막했다. 국제갤러리는 지난해 고려제강의 옛 와이어공장을 복합문화센터로 개조한 수영구 F1963에 첫 분점을 냈는데, 서울에서도 전시한 적 없는 외국 작가를 부산에 곧장 소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호주 원주민 출신인 작가 보이드는 역사를 함축한 검은 그림 위에 희고 투명한 둥근 점을 무수히 찍어 화면을 이루는 게 특징이다. 이 하얀 점을 “한 개의 눈이 아닌 다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렌즈”라 부르는 작가는 무시되거나 일방적으로 기술된 역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억압됐던 사람들은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서사로 한 번 더 억압받는다”고 말했다. 작가는 지난 2015년 오쿠이 엔위저가 총감독을 맡은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했으며 2017년에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등이 브뤼셀의 보고시안재단에서 기획한 전시에 함께하는 등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조현화랑의 달맞이고개 본관에서 개막한 박서보 전시 전경.
개관 30주년을 맞은 달맞이고개의 명소 조현화랑은 최근 해운대구 파라다이스호텔 맞은편에 신규 공간을 하나 더 열었다. 개관전을 겸해 지난 12일 본관인 ‘조현화랑 달맞이’와 분관 ‘조현화랑 해운대’에서 원로화가 박서보의 전시를 동시에 개막했다. 조현화랑은 박 화백이 ‘단색화’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훨씬 이전인 지난 1991년부터 꾸준히 전시를 열었고 이번이 12번째 개인전이다. 마침 1991년은 박서보가 물에 적셔 여러 겹 포갠 한지에 수직적으로 골을 낸 ‘후기 직선 묘법’을 처음 시작한 때이고, 작가는 지난해에 이 시리즈를 “그만하겠다”고 선언했기에 한 시기를 정리하는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전시다. 달맞이 전시장에서는 후기 직선 묘법 중에서도 90년대 초에만 제작했던 흑백 시리즈와 드로잉이, 해운대 전시장에는 2000년대 이후 화사한 색채를 더한 작품들이 걸렸다. 조현화랑 측은 내년 3월로 예정된 아트바젤 홍콩에서는 박서보의 개인전과 함께 ‘숯의 화가’ 이배의 대규모 설치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글·사진(부산)=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조현화랑이 새로 개관한 해운대점 전시장에서는 박서보의 후기 묘법 중에서 2000년대 이후의 채색작업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