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왼쪽)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연합뉴스
중소기업중앙회가 개별 중소기업이나 기업이 속한 협동조합을 대신해 납품대금을 올려달라고 대기업에 조정을 신청하고 협의에 나설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사용자 단체인 중기중앙회는 한국노총과 ‘반대기업 전선’을 위해 손을 잡았다. 이번 결정에 중견·중소기업들은 대기업과의 가격협상력이 강화될 것이라며 반색하고 있지만 대기업은 가격 시장이 왜곡될 수 있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L자형 경기침체가 이어지며 내년 경영환경이 불투명한 시점에 ‘메이드 인 코리아’의 경쟁력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 관계 부처와 더불어민주당은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을 포함한 ‘대·중소기업 거래관행 개선 및 상생협력 확산 대책’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에 따르면 납품대금 조정신청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중기중앙회에도 조정협의권을 부여한다. 지난 7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납품대금 조정신청제도는 계약 기간에 공급원가 변동 등으로 납품대금 조정이 필요할 때 납품업체(중견·중소기업)가 원사업자(대기업)에 대금조정 협의를 요구할 수 있는 제도다. 만약 협의에 이르지 못하면 중기부에 분쟁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당국은 협상력이 약한 개별 기업이나 조합을 대신해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중기중앙회가 나서 납품가격을 협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기업들은 이번 대책에 대해 “시장논리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며 강한 불만을 토해내고 있다. 납품가격은 수요 등 경기상황과 제품의 가격·품질 경쟁력 등 시장논리에 따라 결정되는데 당사자가 아닌 이해단체가 개입할 경우 왜곡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도 업종별 조합에 납품단가 협의권이 보장돼 있는 상황에서 중기중앙회에까지 협의권을 부여하는 것은 ‘옥상옥’으로 과도한 개입이라는 입장이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전 세계에서 하도급거래 계약을 맺을 때 거래 당사자 외에 이해단체까지 개입하는 사례는 없다”며 “이런 식이라면 대기업 쪽에서도 협의를 대신할 수 있는 기구를 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영선(왼쪽)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글로벌 분업’이 일반화돼 있는 글로벌 서플라이체인 속에서 오히려 국내 중소·중견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대기업들의 ‘코리아 엑소더스’가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중소·중견기업들이 기술개발(R&D)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비용절감 등을 통해 납품단가를 낮추기보다 협의에 의존하는 현상이 심화해 글로벌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무한경쟁 속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단 1원이라도 뛰어난 납품사를 찾아 전 세계를 헤매는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는 굳이 값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국내 납품업체를 찾지 않고 해외 기업과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재계 단체의 한 관계자는 “기술·품질이 똑같은 조건이라면 한 푼이라도 가격이 낮은 납품기업을 찾을 것이고 국경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며 “이번 대책의 목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엉뚱한 결말이 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가격 후려치기’가 문제가 돼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시기적으로 L자형 장기불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정책 도입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이번 대책에 가장 민감한 곳은 자동차 산업이다. 1차·2차·3차 벤더로 이어지는 부품과 모듈별 납품계약이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내 자동차 산업이 글로벌 수요위축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자동차 5개사의 생산량은 올 들어 11월까지 361만3,077대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400만대를 밑돌 것으로 전망된다. 2005년 세계 5위였던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지난해 멕시코에 이어 7위까지 추락했다. 당국은 이번 대책에 자발적 상생협력 대기업에 대한 상생협력기금 세액공제, 출입국 우대, 금리우대 등의 인센티브를 추가했지만 정작 대기업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미 상당수 기업이 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한데다 본질적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는 우려에 비해 인센티브의 효용성이 적다는 반응이 나온다.
/김민형·박효정기자 kmh204@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