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어떻게 D램 진출 10년만에 '1위'가 됐을까?

이병철 창업주의 '도쿄선언' 후 '초격차'로 선두업체 따라잡아
스택과 트렌치 형을 놓고 저울질 할 때도 올바른 판단
8인치 웨이퍼 선채택하며 생산성까지 향상
1983년 반도체 진출한 후 10년만에 D램 1위에 올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20여년전 쓴 본인의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반도체 산업을 ‘타이밍의 업(業)’으로 정의한다. 반도체 산업은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해 수조원의 선행투자를 최적의 시기에 해야하기 때문에 투자 시기 결정 시 ‘피를 말리는 고통이 뒤따른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물론 다른 반도체 업체들도 투자 결정 시 피를 말리는 고통이 뒤따랐겠지만 결과는 삼성전자(005930)의 압도적 압승이다. 무엇이 이 같은 다른 결과를 낳았을까. 여기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직관에 기반한 ‘초격차’ 경영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1983년 12월 진행된 삼성전자 64K D램 개발 성공 발표회. /사진제공=삼성전자
17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1983년 3월 이병철 창업주의 ‘도쿄선언’에 따라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후 매년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삼성이 TV 등 가전에서도 기술력이 눈에 띄지 않다는 점에서 3년내에 실패할 것”이라는 조롱을 쏟아내기도 했다. 당시 반도체는 인구 1억명 이상, 국민총생산(GNP) 1만달러 이상, 국내 소비 50% 이상이라는 3박자가 맞아야 가능한 산업으로 분류됐지만 당시 한국은 이 중 어느 하나도 충족 시키지 못하고 있던 탓이다.

하지만 삼성은 세계 D램 시장의 주력 제품인 64K D램 개발을 1983년 5월에 시작해 같은해 12월에 이를 시장에 내놓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매주 일본을 오가며 기술자들과 D램 개발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당시 일본과의 반도체 기술 격차가 10년에서 4년으로 좁혀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후에도 삼성전자는 기흥 지역을 반도체 공장부지로 확정하고 보통 2년이 넘게 소요되는 공사 기간을 착공 6개월 만에 완공하며 ‘반도체 초격차’에 본격 시동을 건다.


선두 업체 추격에 여념이 없던 삼성전자는 반도체 시장 진출 4년만인 1987년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삼성 경영진은 4메가 D램 개발 방식을 ‘스택’으로 할 지 ‘트렌치’를 할 지를 놓고 장고에 들어간다. 이 회장을 비롯한 삼성전자 경영진, 일본 기술자 등은 이 문제를 놓고 새벽까지 토론하기도 했다. 당시 반도체 용량이 커지며 반도체 칩 평면에만 셀을 집적시키는 방식은 물리적 한계에 부딪혀 스택과 트렌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스택 공법은 셀을 위로 쌓아 올려 집적도를 높이는 방법이며 트렌치 공법은 셀을 아래로 파고 내려가면서 집적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장단점도 분명했다. 트렌치 방식은 웨이퍼 표면을 아래로 파내서 지하층을 만들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고 작은 칩 제작이 가능하다. 다만 스택 공법에 비해 공정이 까다롭고 경제성이 떨어지며 제품 불량이 발생했을 때 내부 회로를 확인하기 어렵다. 스택 공법의 장단점은 트렌츠 공법의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당시 이 회장은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히 보려 한다’는 본인의 신념에 따라 스택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이 회장은 이와 관련해 “두 기술을 단순화 해 보니 스택은 고층으로 쌓는 것이고 트렌치는 지하로 파들어가는 식이라 위로 쌓아올리는 것이 문제가 생겨도 쉽게 고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며 “이후 트렌치를 채택한 도시바가 양산시 생산성 저하로 D램 선두자리를 히타치에 빼앗겼고 16메가 D램과 64메가 D램에 스택 방식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회상한다. 이 같은 스택 공법 채택은 삼성이 반도체 시장 진출 10년만에 D램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르게 하는 ‘신의 한수’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198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3라인 착공식 현장. /사진제공=삼성전자
삼성전자는 1993년 반도체 5라인을 8인치 웨이퍼 생산라인으로 정하며 또 한발 앞서가게 된다. 당시만 하더라도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세계 표준이었다. 면적은 지름의 제곱으로 증가한다는 점에서 6인치와 8인치는 생산량에서 두배 가량의 차이가 났지만 기술적 부담 때문에 대부분이 6인치를 고수했다. 당시 이 회장은 수율 문제 등으로 1조원 가량의 손실이 예상된다는 주위 만려에도 불구하고 8인치 생산라인으로 최종 확정하며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게 된다. 당시 이 회장은 “우리가 세계 1위로 발돋움 하려면 그때가 적기라 생각했다”며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판단했다”고 회상한다. 실제 당시 반도체 직접 기술은 1983년부터 1994년 사이에만 4,000배 가량 발전해 단기간의 기술 확보 없이는 기술 개발 주기를 따라가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단계를 착실히 밟는 편안한 길이 아닌 삼성 특유의 ‘초격차’ 전략에 기반한 과감한 판단을 내린 셈이다.

삼성전자는 1993년 6월 반도체 5라인을 준공했으며 바로 6라인과 7라인을 착공하며 8인치 웨이퍼를 주력으로 삼게 된다. 5라인 가동은 1994년 7월부터 시작됐다. 이 덕분에 16메가 D램 개발은 일본과 동시에 시작했지만 생산량이 2배 가량인 8인치 웨이퍼를 사용함으로써 막강한 생산력을 갖추게 된다. 삼성전자가 D램 부문에서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것 또한 이 즈음이다. 이 회장은 D램 시장 1위에 오른 날 경영진에게 “목표가 있으면 뒤쫓아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번 세계의 리더가 되면 목표를 자신이 찾이 않으면 안되며 또 리더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며 되레 채찍질을 가하기도 했다. 이 회장 입장에서는 여전히 일본이 주도하던 당시 반도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글로벌 1위 도약’이라는 축배를 들 여유도 없었던 셈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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