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의 창]돈을 돌게 허(許)하라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한국 기업들의 영업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올해 상장사들의 당기순이익은 2년 연속 감소해 전년 대비 40% 내외의 감익이 예상된다. 상장사 당기순이익이 연속 2년 이상 감소한 사례는 과거 두 차례밖에 없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국면에서 3년 연속 이익이 줄었고, 2012~2013년 조선과 건설업 등에서 부실을 일시적으로 털어냈던 시기에 2년 연속 이익이 줄어들었다. 중국 경제의 구조적 둔화와 보호무역이 한국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영업환경은 악화되고 있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흐름은 강화되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의 주주권 행사 강화 움직임에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로 대표되는 사회책임투자도 강조되고 있다. 주주와 경영진 사이의 긴장이야 주주자본주의에 내재돼 있는 속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기업의 책임을 요구하는 일련의 흐름 속에는 ‘부자 기업과 가난한 가계’라는 코드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말 기업이 여유가 있나. 기업과 가계 전체적으로 보면 이는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길게 보면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분배구조는 기업이 주도권을 쥐는 방식으로 변해왔다. 사내 유보금 2,000조원 운운은 사내 유보금을 기업이 언제든 사용 가능한 쌈짓돈으로 잘못 해석한 무지의 소산이지만, 상장 제조업체들의 현금보유액은 지난 9월 말 현재 203조원에 달하고 있다. 금융업도 아닌 제조업체들이 천문학적인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는 점은 정상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9월 말 현재 현금 보유액은 26조원인데 이는 최근 3년 동안 연평균 1.7% 증가한 데 불과하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상장 제조업체들의 최근 3년 현금증가액은 연평균 6.3%에 달하고 있다.

기업과 가계를 비교해 보자. 최근 3년 동안의 기업 예금 증가율은 연평균 6.9%로 가계 예금 증가율 6.5%를 넘어서고 있다. 국민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기업은 돈을 빌리는 순차입자, 가계는 돈을 빌려주는 순대여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정상은 아니다. 주택 가격 상승으로 가계의 총량적 부가 늘어났을 수는 있지만 집값 상승으로 늘어난 부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돈이 아니다.

기업에 쌓여 있는 부를 돌게 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은 과거 보수 정권 하에서도 행해진 바 있다.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기업소득 환류세제’를 도입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이익을 기록한 기업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주거나, 주주들에게 배당을 늘리거나, 투자를 늘리지 않을 경우 징벌적 과세를 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기업이 가지고 있는 부를 가계로 돌리고자 하는 아이디어에 다름 아니다.

어려운 기업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과도한 잉여 자금을 내부에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은 자금의 용처에 대해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특히 기업의 이익 창출 능력을 보여주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이 기조적으로 하락하는 기업들은 배당을 파격적으로 늘려야 한다. 부의 증식을 기업 스스로 효율적으로 하기 어렵다면 주주들이 그 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8년 상장사들의 현금배당 지급 총액은 전년 대비 16% 증가하면서 사상 최초로 30조원대에 올라섰지만 삼성전자를 제외한 기업들의 배당 증가율은 2.9%에 불과했다. 상장 제조업체들 중 보유 현금이 자기자본의 20%를 넘어서는 기업은 지난 3분기 말 현재 505개에 달하고 있다. ROE가 낮고, 투자도 변변히 하고 있지 않으면서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기업이라면 돈을 돌게 허(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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