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캐롤라이나주 하원은 연방 탈퇴까지 거론한 보고서를 5,000부나 뿌렸다. 연방의 정책, 특히 관세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영국(33%)과 프랑스(24%)보다 높은 40%대의 관세율을 최고 62%까지 올린 1828년 관세법에 남부는 들끓었다. 고율 관세와 보호무역의 혜택은 수입 대체산업을 키운 북부 제조업에 돌아가는 반면 농작물을 수출하는 남부의 관세부담율이 더 높아질 게 뻔한 상황. 개진서에도 ‘연방 관세법은 헌법이 연방에 부여한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무효’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는 개진서의 내용이 일부나마 수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존 칼훈 미국 부통령 초상화/위키미디어
새롭게 당선된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존 칼훈(사진) 부통령이 모두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이었다. 개진서를 쓴 사람도 실은 칼훈. 전임 정부의 부통령이었고 새롭게 구성될 정부의 부통령 당선자인 칼훈은 ‘연방 관세의 3분의 2가 남부에 부과된다’며 개진서를 썼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잭슨 대통령은 ‘국가 파괴 행위’라며 ‘아무리 내 고향이라도 연방에 저항해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한다면 군대를 투입해 반역 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남부의 각주는 저항을 다짐했으나 ‘관세법의 틀은 유지하되 세율은 점차 내린다’는 합의가 이뤄지며 연방법 무효화 갈등은 일단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참았던 남부의 불만은 30여 년이 지난 후 남북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터졌다. 남부의 피해의식과 증오를 깊게 만든 칼훈의 개진서는 타당했을까. 내용은 판단할 수 없어도 행적은 가늠할 수 있다. 칼훈은 당초 강력한 연방주의자였던 인물. 미영전쟁(1812) 개전과 국립은행 설치, 국토 종합개발은 물론 관세법 도입까지 앞장선 적도 있다. 칼훈이 강력한 연방주의자에서 급진적인 주권론자로 변신한 이유는 해석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신념을 바꾸며 정치적 입지를 유지한 그의 정치활동이 갈등을 심화시키고 피까지 불렀다는 점이다. 변절자는 위험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