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판사 '솔로몬의 지혜'인가 '법원 판결 보조'인가

에스토니아 소액재판·美 렉스 마키나…AI, 법조계 진출
사법농단·전관예우·무원칙 배당 등 차단 '공정판결' 기대
"형사사건·이혼 등 가치판단 어려워 역할 제한적" 의견도


“A씨는 B씨에게 5,000유로(650만원)를 지급하시오.”

북유럽의 디지털 강소국인 에스토니아 민사법정에서 내년 중 소액사건에 대해 인공지능(AI)이 내릴 판결이다. 여기에 이의가 있으면 정식으로 재판에 출석해 따지게 된다.

‘X로드(X-Road)’라는 전 국민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한 에스토니아가 7,000유로(910만원) 이하의 소액재판에 대해 AI 판사를 쓰기로 했다. 국민에게 신속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판사에게는 좀 더 크고 중요한 사건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존 판례 등 빅데이터 기반 판결

에스토니아는 우선 소액재판에 대해 AI 판사를 도입, 기존 판례 등의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하도록 할 방침이다. 노하우가 쌓이면 중장기적으로 AI가 점차 더 큰 민사소송이나 형사재판에까지 판사를 보조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사법정책연구원 등이 18일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주최한 ‘AI와 법, 그리고 인간’ 토론회에서 카이 헤르만드 에스토니아 법무부 차관(판사)은 “에스토니아는 ‘X로드’를 통해 국민들의 빅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데, 정형화된 유형이라 분쟁 가능성이 낮은 소액재판에서 AI 판사가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소액재판은 나름 매뉴얼이 정해져 있어 자동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구 133만여명의 소국인 에스토니아는 행정은 물론 세금·의료·부동산·교육·재판 기록 등을 X로드에 대부분 디지털화했다. 전자투표도 도입해 선거에서 절반 이상이 컴퓨터로 투표한다. 이렇게 디지털화한 것을 바탕으로 소액재판에 AI 판사까지 도입하게 된 것이다.

AI가 발달한 중국은 올 초부터 기존 판사를 모델로 한 ‘AI 가상 판사’가 형사 소송 전 과정을 돕는 온라인 서비스를 도입했다. 소송 당사자가 가상판사에게 질문하면 키워드 판독을 통해 맞춤형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중국은 2017년 항저우를 시작으로 베이징·광저우 인터넷 법원에서 사이버 거래나 지적재산권 문제 등에 관해 온라인 소송 당사자를 안면인식으로 식별한 뒤 음성인식으로 속기하고 온라인으로 증거자료를 받아 판결하고 있다.

호주의 가정법원도 AI가 94개 요소를 제시해 이혼하는 부부형 재산 분할을 해준다.


◇“판결 예측 가능성 높아질 것”

이처럼 세계적으로 AI 판사가 특정 영역을 중심으로 점차 도입되고 있다. AI가 신속하고 공정한 판단을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특히 형사사건의 경우 양형 기준에 맞춰 판단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의 적폐를 해소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도 나온다. 판사의 재량권에 따라 1·2·3심의 판결이 다른 경우도 적지 않은데 AI 판사를 도입하면 예측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 시절 ‘사법농단’ 사건이라든지 여전히 지속되는 법조계의 ‘전관예우’ 등을 고려해 재판에 AI의 판단을 가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직권남용과 공직선거법 위반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경우 지난 5월 1심에서 모두 무죄가 난 뒤 9월 2심에서 300만원 벌금형이 선고될 때 판사 배당 방식을 둘러싸고 논란이 생긴 바 있다. 로스쿨 4기 출신인 우충사 변호사는 “전자배당으로 사건을 배정받은 판사가 이 지사 변호인단 중 한 명과 연수원 동기라는 점이 기피사유가 됐는데 그 뒤 법원에서 보수 성향의 대구 출신 판사로 변경해 배정했다”며 “아직은 인간이 재판하는 게 맞다고 보지만 AI가 보조 역할을 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대법원이 2016년 10월 개최한 ‘4차 산업혁명과 사법의 미래’ 심포지엄에서 오렌 에치오니 미국 앨런인공지능연구소장과 로만 얌폴스키 미국 루이빌대 사이버보안연구소장은 AI가 고도로 발달하는 단계를 전제로 “판사의 역할을 대신하는 AI가 등장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AI 변호사 ‘로스’ 초당 10억건 검토

현재 AI는 판사나 변호사의 보조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단계다.

2017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는 판사가 AI 알고리즘 자료를 바탕으로 형사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했고 위스콘신주 대법원도 이에 동의했다. 미국은 연방 대법원 차원에서 오는 2021년 빅데이터 기반의 차세대 전자소송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변호사를 돕는 AI도 있다. 미국 렉스 마키나(법률기계라는 뜻)는 기존 판례를 학습한 뒤 사건의 승소율을 예측하고 담당 법원이나 판사의 성향 등을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IBM이 2016년 개발한 로스(ROSS)라는 AI 변호사는 지난해 미국의 대형 로펌에 채용돼 파산 전문 변호사를 보조하며 초당 10억건이 넘는 법률문서를 분석한다.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은 “법원은 차세대 전자소송 시스템을 구축해 재판에 지능형 사건관리 플랫폼을 도입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며 “전자소송문서 등의 정보를 빅데이터 형태로 AI 기술에 활용하면 지능형 통합검색 서비스를 통해 해당 사건과 유사한 판결문을 자동 추천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AI 가치판단 능력 떨어져 보조 역할

물론 AI가 판례를 잘 분석하더라도 전후 맥락을 따져 가치판단을 하는 능력은 떨어져 형사사건에까지 도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소송에서 계속 자신이 유리한 증거를 제시하고 주장을 내세우는데 AI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소년사건’이나 ‘이혼소송’ 등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분야로 꼽힌다. 만약 AI에 잘못된 데이터가 입력되면 판단에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고 AI가 기존 판례를 바탕으로 재판하게 되면 소수의견이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양종모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인공지능에 의한 판사의 대체 가능성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재판도 진행하고 각종 심문·신문도 행하는 소위 로봇 판사는 단순한 알고리즘을 넘어 인간과 흡사한 로봇의 개발이라는 과제를 남긴다”며 “현재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구상”이라고 했다.

◇‘리걸 테크’ 산업영역으로 발전

결국 AI 판사가 ‘솔로몬의 판단’을 할 날이 올지, 기계적인 판단으로 인간의 보조 역할에 머무를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이상용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은 “오늘날 사법부나 법조인들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보면 AI 기술의 도움을 받는 게 마땅한 것처럼 여겨진다”며 “다만 사법적 작용이 국가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한 근본원리와 잇닿아 있어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지적했다. 강현중 사법정책연구원장은 “리걸 테크(Legal Tech·법률 서비스 제공 기술)가 하나의 산업영역으로 발전하고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며 “시기와 속도가 문제이지, 방대하게 축적된 법률정보를 통해 AI는 언젠가 법률 영역에 도입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찬규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장은 “인간 사회의 행동과 판단의 정점에 있는 법의 관점에서 AI를 냉정히 판단해 기계화된 지능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과장된 기대가 수그러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