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뒤안길] 일제가 남긴 유리건판 사진

3만8,000점 자료에 100년전 모습 오롯이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을 담은 유리건판.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이던 1900년대 초반 숭례문 앞으로는 넓게 닦은 신작로가 있었고 최신식 교통기관인 전차가 지나다녔다. 서양식 건축기법으로 지어진 상가가 다닥다닥 들어섰고 사이사이에 전봇대가 자리를 잡았다. 사진술이 발달하지도, 상용화되지도 않았던 당시의 기록을 전하는 게 바로 ‘유리건판’이다. 유리건판은 감광성을 가진 액체 물질인 감광유제를 유리판에 발라 건조시킨 일종의 필름인데, 현대식 필름이 나오기 전인 20세기 초반에 널리 사용됐다.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조선총독부는 1909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는 물론 만주 지역까지 분포한 우리 문화재와 풍습·자연환경을 유리건판 사진으로 촬영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촬영해 관리하던 유리건판은 해방 이후 설립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자료의 양만 3만8,000여점으로 방대하다. 이 유리건판이 담고 있는 사진은 고고학 자료(1만4,000여점)가 가장 많다. 선사시대(1,752점)부터 부여와 삼한(246점)을 지나 일제강점기 당시까지 아우른다. 특히 낙랑(4,053점)과 고구려·발해(1,230점) 등 지금의 북한 땅에 존재하던 문화재를 촬영한 것도 다양하고 풍부해 문화유산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자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87년부터 소장품인 유리건판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했다. 2005년 지금의 용산 자리로 이전하면서는 유리건판 전용 수장고를 마련했고 인화는 계속됐다. 무려 32년이 걸린 인화작업이 최근에 마무리됐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리건판 전량을 고화질로 디지털화해 소장품 공개 형식으로 e뮤지엄(www.emuseum.go.kr)을 통해 공개했다. 600만 화소에 용량도 3~5MB라 A4용지에 인쇄도 가능하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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