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에 언제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나 가곡 같은 노래에서 벗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당시 집에는 낡은 외국산 라디오가 한 대 있었다. 라디오 튜너에 더블데크 카세트가 합쳐진 기계였다. 아마도 부모님들이 어린 남매의 목소리를 녹음하려는 생각으로 1970년대 후반에 큰맘 먹고 구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남매가 녹음기 앞에서 재롱잔치를 부릴 나이가 지나자 이 ‘카세트라디오’ 역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됐다.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이던 것이 내가 사춘기에 들어설 나이가 되자 다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어 그저 라디오에 나오는 대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오면 집 앞 상가에서 사온 공테이프에 녹음을 했다. 녹음된 곡의 개수가 어느 정도 쌓이면 더블데크로 테이프를 ‘편집’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 내가 흥미를 갖고 들었던 노래들은 편차가 대단히 심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라디오에 많이 나오던 정수라나 조용필의 신곡들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들국화’나 ‘산울림’ 같은 밴드나 그 무렵 히트를 친 ‘도시의 아이들’의 노래들도 편집 테이프 목록에 들어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통해 노래를 접해서 그랬는지 주로 한국 가요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몇 년 후 동년배들이 이미 팝송에서 록을 지나 헤비메탈로 관심이 넘어간 것을 보고 조금 놀라기도 했다.
라디오란 소리 정보를 전파로 변환해 송출하면 그것을 공기 중에서 잡아내 다시 원래의 소리 정보로 변환해내는 장치다. 어릴 때에는 이렇게 간단한 장치만 있으면 먼 곳에서 전하는 목소리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잠이 안 오는 새벽에 AM 라디오 주파수 대역을 오가면 가끔 일본어 방송이 잡히거나 수상쩍게 들리는 난수방송이 들릴 때가 있었다. 이렇듯 라디오 방송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목적을 가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독점 방송국에서 국민 통합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로 이용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미국에서는 민간 영역의 전파 이용을 금지하고 해군의 통신용으로 독점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이 격화되자 라디오는 양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는 유용한 수단이 됐다. 특히 미국에서는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 방송을 통해 말 그대로 ‘미국의 목소리’를 다양한 언어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1945년 조선의 해방은 라디오를 통해 전달됐다. 그해 8월6일에 히로시마에, 8월9일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가 있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8월15일 정오에 일본 정부로부터 중대 발표가 예고돼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여러 사람이 라디오 앞에 도열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NHK 아나운서가 방송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중대한 방송이 있겠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기립하여 주십시오. 천황 폐하께서 황공하옵게도 전 국민에게 칙서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삼가 옥음(玉音)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일본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기미가요가 연주된 후 곧 히로히토 일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現狀)에 비추어보아 비상의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여…”로 시작되는 이 연설은 일본의 항복을 일본 신민들에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진 전파력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라디오의 힘은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세력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장악한 곳은 청와대와 육군본부 등 권력기관들과 중앙방송국(KBS)이었다. ‘군사혁명’이 일어났음을 널리 알리고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동이 트기 전에 군사혁명 공약을 전파할 필요가 있었다. 신문은 국민들에게 전달되기까지 시차가 있었다. 따라서 생방송으로 실시간의 상황을 전파하는 데는 라디오가 제격이었던 것이다. 새벽 5시께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혁명공약 6개조는 마침 그날 새벽 당직을 서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이렇게 해서 정권 획득에 성공한 군사정부는 공보(公報) 활동에 라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1년 6월 초의 한 신문은 서울중앙방송국이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국민 계몽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매일 오전9시와 정오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발표를 보도했다. 그 외에도 오전6시부터 오후11시까지 매시간 5분씩 뉴스 시간을 할당해 최신 소식을 접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황금시간대인 오후8시10분부터 30분까지는 ‘서울의 패트롤’ ‘농촌의 밤’ ‘건설의 양지’ 등 쿠데타 이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을 조명하는 시간이 배정됐다.
1980년대 시민들이 라디오에 넣는 카세트테이프를 구경하고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문제는 라디오 보급이 도시 지역에 편중돼 있어 농어촌 지역까지 중앙정부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정부 입장에서는 농어촌 지역의 라디오 보급을 빠른 속도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금성사에서 마침 1959년에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을 출시했고 이듬해에는 최초의 국산 트랜지스터라디오인 TP-601을 내놓았다. 1962년 박정희 의장 부부가 직접 사용하던 라디오 3대를 공보부에 기탁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1년도 되기 전에 약 2만4,000대의 라디오가 농어촌 지역에 보급됐다. 여기에 마을 스피커를 이용해 청취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이제 한국 전역에 라디오 방송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이렇게 배부된 라디오는 부락 공용으로 지정돼 국영방송인 KBS 제1방송만 청취가 가능했다. 당연하게도 방송국에서는 농어촌 관련 방송 콘텐츠를 강화했다.
이로써 라디오라는 테크놀로지는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결정적인 통치의 장치로 기능하게 됐다. 공동체라는 것이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된’ 것이라면, 테크놀로지는 그 상상을 구체적으로 만든다. ‘한국인’이라는 범주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이후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디오라는 매체는 1970년대 이후 텔레비전에 그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에 따라 라디오가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국가 차원의 노골적인 공보보다는 점차 민간 차원의 문화 영역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를 만드는 매체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가지는 공동체 의식을 생각해보라. 텔레비전을 넘어 인터넷 세상이 됐지만 아직도 라디오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 들으며 시청자 코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대학생이 된 후 라디오와 점차 멀어지게 됐다. 정기적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차분하게 라디오를 들을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시절 두근두근하며 들었던 방송에 대한 추억은 남아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들었던 사람들과는 왠지 약간의 동질감마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수는 여전히 이문세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