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길 하나금융투자 연구원
‘이번엔 다르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인 케네스 로고프가 2010년도에 발간한 저서의 제목이다. 이 책은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과거 수 백년 동안 경험해온 금융위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경제위기를 주제로 한 책들이 드물지는 않지만 이전의 서적들이 주로 서술적 설명에 의존했다면 이 책은 과거 800년 동안 66개 국가라는 광범위한 대상에 대해 데이터 기반의 접근을 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가 있다. ‘이번엔 다르다’는 12세기 중국 송나라부터 시작해서 14세기 스페인 합스부르크,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2008년의 서브프라임 위기까지 폭넓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과거 모든 금융위기 직전에는 경제호황이나 자산가격의 급등이 있었다. 동시에 위기의 조짐들도 관찰됐지만 그때마다 전문가나 경제관료들은 번번이 ‘이번엔 다르다’고 자신하며 위기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로 과거의 원칙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호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대부분은 예외 없이 금융위기라는 결과로 귀결됐다. 즉, 알고 보면 ‘이번엔 다르다’는 제목은 실제로는 ‘어떤 것도 다르지 않았다’라는 강한 역설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 IT버블 붕괴가 한 예가 될 수 있다. 당시 미국 기술주들은 밸류에이션 측면에서 유례없는 과대평가 상태였고 이외에도 많은 지표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IT라는 신기술은 과거 전통산업과는 다른 잣대로 평가해야 하기에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연준의장이었던 그린스펀은 자산유동화와 같은 새로운 금융기법이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유동성을 확대해 자산가격상승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과도한 부채는 반드시 신용위기라는 과정을 통해 균형상태로 복귀하게 되어있다. 균형상태로의 복귀가 의미하는 것은 물론 자산가격의 위축이다. 다만 신용위기 발생시점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금융시장에서 임계점이라는 것은 정량적 기준 이외에도 시장참여자의 신뢰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글로벌 자산시장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보다시피 현재는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이 동시에 사상 최고점을 넘어 끝없는 상승세를 이어가는 시장이다. 중앙은행의 완화적 통화정책과 정치적 리스크의 해소 속에 경기반등에 대한 기대감이 증시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산가격 상승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물가는 저금리 국면을 연장시키면서 채권시장에도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지표들이 경고신호를 보내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가장 명백한 시그널은 부채의 영역에서 관찰된다. 현재 미국의 기업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74%로 금융위기 직전 수준을 넘어 사상 최고수준까지 높아졌다. 과거 80년대 후반 저축대부조합 사태 때나 2000년 IT버블 시기나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당시를 참고할 때 현재 부채수준은 한계상황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고 판단할 만 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 위기발생 시점은 이러한 정량적 수치만으로는 예견할 수 없다. 또한 현재 시장에서 자산가격이 상승추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이 때문에 현 시점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에 고르게 배분된 포트폴리오를 운용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일 것이다. 다만 이 가격상승의 성격에 관해서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 소비와 생산, 투자의 순차적 확대라는 선순환에 의한 결과인지 아니면 차입확대에 따른 화폐적 현상인지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 두 상황은 비슷한 형태로 표현되지만 향후 전개과정에 있어 극적인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만약 지금이 후자의 상황이라면 시장참여자들은 투자를 이어가되 적절한 경계심을 동반해야만 할 것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시장은 언제나 같은 원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이 원칙은 자산가격이 펀더멘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원칙이다. 물론 달라진 것도 있다. 현재 시장금리는 과거 어느 시절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낮은 수준이다. 금리는 화폐의 가격이다. 값싼 화폐가 시장에 무제한적으로 뿌려졌다는 점에서 지금은 분명 예전과는 다른 세상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 시장의 본질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