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 檢 기소만 해도 '해임 요구' 가능...경영계 불참에도 밀어붙여

['대표이사 해임' 칼 쥔 국민연금]
복지부 "국민연금도 '주주'...무죄 추정 원칙에 위배 안돼"
경영계 "별도 통제장치 없어...기업활동 심각하게 위협"
감사위원 선임·배당정책 '집중투표로 변경 허용'도 부담

박능후(앞줄 오른쪽) 보건복지부 장관이 27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제9차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최종 의결한 27일. 사용자단체 대표로 기금위에 참석했던 3명의 위원 가운데 2명은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기금위가 의결권을 쥐고 있는 사용자단체는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대한상의·중소기업중앙회 등 세 곳이다. 나머지 한 곳도 논의 과정에서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강행 의지를 내비치자 결국 회의 말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금 조성의 핵심주체인 기업의 의견을 묵살하는 가이드라인 내용도 문제지만 기금위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 강행 절차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경영계가 우려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다. 우선 검찰 등 수사기관이 횡령, 배임, 부당지원, 경영진의 사익 편취 등의 위법행위가 있다고 판단한 기업의 이사 해임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유죄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 기소만으로 해임을 요구하는 것은 헌법의 ‘무죄 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게 경영계의 주장이다. 이 같은 내용은 올해 초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행사했던 주주권보다 한발 더 나아간 수준이다. 당시 국민연금은 조양호 전 한진칼 회장이 배임·횡령 등으로 형이 확정될 경우 이사직이 자동 박탈되도록 정관을 바꾸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관변경을 제안했다. 경영권 개입의 첫 사례였다. 물론 정관변경안은 주총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복지부는 이에 대해 국민연금이 ‘주주’인 만큼 상법에 위배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투자자 입장에서 유죄 확정은 중요하지 않고 그 사안으로 기업의 주주가치가 훼손됐느냐가 중요하다”며 “그 상황만으로도 투자를 재검토하고 대응 방안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감사위원 선임과 배당정책을 두고 국민연금이 집중투표를 할 수 있도록 정관을 변경 가능하게 한 조항도 우려가 큰 부분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선임되는 이사의 숫자만큼 주주에게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선임되는 이사가 3명이면 1주당 총 3표를 갖게 되는데, 이 표를 한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다. 현행 상법도 이 집중투표제가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어 기업이 이를 배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6년 ‘기업 사냥꾼’으로 불렸던 칼 아이컨이 KT&G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집중투표제를 통해서였다. 복지부는 이 역시 상법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상법(제382조의 2)은 ‘2인 이상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는 정관에서 달리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중투표로 이사를 선임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집중투표제를 채택하되 예외적인 경우에만 정관을 변경해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계는 감사위원 분리선임안과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위임장 경쟁) 등도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다며 보완을 요청해왔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으로 분류했던 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ESG) 평가등급 하락은 ‘중점관리 사안’으로 변경하고 국민연금의 주주활동 목적이 기금의 장기수익 및 주주가치 제고라는 점을 명확히 규정하는 등의 내용에는 경영계의 의견이 일부 반영됐다.

수정안에는 또 수탁자책임활동기간을 단축하거나 바로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 내용도 들어갔다. 가이드라인에는 주주권 행사를 위해서는 ‘비공개 대화→비공개 중점관리→공개 대화→주주권 행사’의 단계를 밟는다. 초안에서는 각 단계별로 1년의 기한을 두기로 했는데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렵다는 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조항을 수정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번 결정을 두고 “기업 경영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특정 이사 해임, 집중투표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임 등을 제안하고 위임장 경쟁까지 할 수 있도록 하면서 별도의 통제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우려했다.

복지부는 두 차례에 걸친 의견수렴을 통해 수정·보완한 안인 만큼 ‘선시행 후보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경영계의 반발이 거세 당분간 진통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 장관은 “주주권 행사 지침이나 내용은 재계와 대화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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