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올해도 20~40대 여성 독자층에 힘입어 출판 시장에서는 페미니즘·퀴어 서사 소설이 큰 힘을 발휘했다. 엘레나 페란테,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등 외국 유명 페미니스트 소설가들의 작품이 연이어 번역 출간되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불모지에 가까웠던 퀴어문학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책 ‘대도시의 사랑법’은 지난해 첫 퀴어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로 주목받은 신예 작가 박상영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2019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비롯해 4편의 중단편을 모았다. 청년세대의 삶,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빠르고 가벼운 서사로 전달하는 이 책은 출간 전부터 ‘채식주의’를 번역한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설립한 ‘틸티드 악시스 프레스’와 번역 출간 계약을 맺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지난 7월부터 4만5,000부가 넘게 인쇄됐다.
표제작 ‘대도시의 사랑법’은 에이즈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채 연극 프로그램 북을 팔며 글을 쓰는 한 주인공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클럽 바텐더 규호와 서로 애정을 느끼고 규호에게 자신의 감염 사실을 고백한다. 규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너”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연애를 시작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로 둘 사이의 관계는 위기를 맞이한다. 이 외에도 ‘늦은 우기의 바캉스’, 게이 남성 ‘나’와 임신중절 수술을 한 재희의 동거를 그린 ‘재희’, 어머니를 간호하다 과거 사랑했던 형의 편지를 받고 마음이 요동치는 ‘영’의 이야기를 담은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등이 수록됐다.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묘사와 함께 보편적이면서 보편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내 퀴어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낸 책이다. 교보문고는 “지난해 퀴어 소설로 혜성같이 등장한 작가가 올해 입지를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이라며 “한국문학계에 또 다른 주제를 던져줬다”고 평했다. /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