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화된 일본’
지난번에 페리가 들이닥쳤을 때 일본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이야기하다 지면이 다했다. 오늘은 이어서 인구 얘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일본 인구는 17세기 전후 1,000만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게 18세기 초에는 3,000만명에 이르렀다. 우리 인구는 해방 무렵에야 이 수준에 이르렀다. 같은 시기 조선 인구는 많아야 1,500만명에도 못 미친 것으로 짐작된다. 유럽은 어땠나. 18세기에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는데도 프랑스는 1715년 1,500만명에서 1789년에는 2,400만명, 독일은 1,700만명(1750년께), 영국은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합쳐도 610만명(1750년께) 정도에 불과했다. 조선도 적지 않은 인구였지만 일본의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1690년대 초 네덜란드인을 따라 에도(江戶)를 방문한 독일인 의사 엥겔베르트 켐퍼(Engelbert Kaempfer)가 놀란 것도 당연했다. “이 나라는 말로 다할 수 없이 인구가 많다. 그런데도 이 많은 인구를 다 먹여 살리고 있다. 도로는 촌과 도시를 촘촘히 엮고 있다. (일본지(日本誌))”
그런데 이 시기 일본의 전체 인구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시인구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3대 도시로 일컬어지는 에도(100만명), 오사카(38만명), 교토(34만명)뿐만이 아니라 각 번의 수도인 수많은 조카마치(城下町·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읍)도 수만명을 보유한 도시들이었다. 18세기 중엽 베이징은 100만명, 런던은 65만명, 파리는 55만명을 헤아렸고, 한양은 30만명을 밑돌았다. 에도는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좁은 도시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또 사람들이 많으니 부딪히는 일도 많았고, 그때마다 “스미마셍(죄송합니다)”을 연발하지 않고서는 질서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칼을 찬 사람과 부딪힐 수도 있다(!) 어쨌든 18세기 일본은 전 인구의 5~6%가 10만명 이상의 대도시에 거주했고 10%의 인구가 1만명 이상의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페리가 개항시키려고 한 일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가 진행된 사회였다는 점을 유념해두자.
‘역사는 외부충격으로 전개된다’
이제 당시 일본이 어떤 사회였는지 대략 짐작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인구 대국이면서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안정돼 있었다. 약 50만명의 사무라이가 다스리는 지배체제는 퍽 튼튼해 보였다. 막부에 대한 다이묘(大名·봉건영주)의 반란 조짐은 없었고 다이묘에 저항하는 민중의 반란도 거의 없었다. 페리함대 같은 외부충격이 없었다면 아마도 도쿠가와 체제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에서 외압, 외부의 영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민족주의와 마르크시즘이 묘하게 혼합된 지난 세기 역사학은 주로 내재적 발전을 강조해왔다. 그래야 마치 한 민족의 주체성이 증명되는 것처럼 주장해왔다. 그러나 실제를 말하자면, 한 사회의 변화는 외압으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사회도, 개인도 스스로 알아서 정신을 차리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외압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외세 배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외세에 반응해 그것을 계기로 자기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의 수준, 그것이 그 사회의 능력이다. ‘자주’나 ‘주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이런 역사의 실상을 가려버릴 수 있다.
‘일본 정계의 대립’
페리의 충격에 일본 정계는 술렁거렸다. 갑론을박하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자 에도 바깥쪽 우라가에 정박해 있던 페리는 선박 한 척을 에도 내해 깊숙이 침투시켰다. 무력시위였다. 에도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당황한 막부는 서둘러 대통령 국서를 수리하겠다고 했다. 1853년 7월14일 페리는 드디어 일본 땅에 상륙했다. 국서 증정식은 30분도 안 걸렸으나,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증정식을 마친 일본 측 실무관료들은 페리함선에 승선해 라이플·증기기관 같은 것들을 견학하고 그 작동방식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것들이야말로 오늘날 일본을 이 궁지에 몰아넣은 원점이 아니던가. 페리는 조약 조인을 위해 내년 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상하이로 철수했다. 돌아가기 전 다시 한 번 에도 내해에서 무력시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년에 딴소리하지 말라는 듯이.
페리가 다시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막부의 로주(老中·총리 격으로 5명 정도 있었다)들은 무조건 전쟁을 피해야 한다며 기항지를 내어주자고 했다. 정식 외교수립이나 통상 개시만 막을 수 있다면 이미 네덜란드인이 들어와 있는 나가사키 같은 항구 한두 곳을 미국에 제공해도 무방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이에 맹렬히 반대한 것이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토번(水戶藩)의 전 다이묘로 쇼군 가문의 종실 중 한 명이었다. 나리아키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은 신국(神國) 일본의 수치라며 전쟁을 각오하고 거부하라고 주장했다. 목소리가 크면 언제나 인기다. 사무라이들도, 에도 시민들도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반겼다.
이 가운데 선 것이 수석 로주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였다. 그는 20대 초에 로주가 돼 이미 10여년간 국정을 맡아왔었다. 당시 다른 로주들은 나리아키라면 손사래부터 쳤지만 아베는 그를 정부에 불러들였다. 정부 바깥의 여론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로주들과 나리아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로주들은 나리아키가 정권을 잡고 싶어서 가망 없는 전쟁을 선동한다고 경멸했다. 그러나 나리아키는 단순한 주전론자는 아니었다.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것도, 무역이 세계의 대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나 전쟁이 무서워 타협한다면 미국뿐 아니라 다른 서양 국가들도 일본을 깔볼 것이고, 무엇보다 국내 민심이 나른해질 것을 우려했다. “모두가 전쟁을 각오하다가 평화가 된다면 좋겠지만 평화에 목매다 전쟁이 나면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배꼽 밑에 평화를 품어둬서는 안 되고, 평화라는 생각을 봉해둔 채 임해야 한다(막부에 올린 상서 중에서)”. 그래도 민심이 정신 차리지 않을 때는 국지적인 전투를 일부러 일으켜야 한다고까지 말했으니 막부 로주들이 그를 광인 취급한 것도 이해가 된다.
지금의 요코하마에서 이뤄진 1854년 미일화친조약.
‘조약체결’
페리가 전쟁을 을러대는 마당에 그의 주장은 너무도 위험한 것이었다. 해군이 전무한 상태에서 페리함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막부 로쥬들이 그를 광인 취급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일단 페리의 요구를 들어줘 돌려보낸 후 국방력을 강화하자는 게 로주들의 생각이었다. 상하이로 물러나 있던 페리는 이듬해 2월 훨씬 대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다시 나타났다. 그 함대의 규모를 보고 막부는 나리아키의 주장을 물리치고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1854년 3월 마침내 페리는 지금은 요코하마가 된 한적한 해안가에 상륙해 조약을 맺었다. 역사상 유명한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조약)’이다. 일본을 개국시키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나가사키 외에 시모다·하코다테 두 항구에 외국 선박이 기항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정식외교도, 통상도 명문화돼 있지 않았다. 막부는 할 수 없이 기항은 허용하지만 200여년간 유지해온 쇄국 방침은 유지하려고 했다. ‘그 사이에 서양을 이길 만한 국방력을 키우자.’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일본을 개국으로 이끈 로주 아베 마사히로.
‘아베 마사히로의 개혁’
페리가 떠난 후 아베는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먼저 나가사키에 해군학교를 열었다. 그다운 혜안이다. 바다에서 생선이나 건져 올려서는 이제 나라의 명줄까지 내놓아야 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을 간파하고 네덜란드 교관을 모셔와 조선술·항해술 등을 가르쳤다. 막부나 번을 막론하고 우수한 가신을 입학시켜 미래의 해군 인재를 기르기 시작했다. 우수한 외국인을 최고대우로 고용해 일본인 제자를 양성하게 하는, 이후 근대일본이 채택한 발전전략의 출발점이다. 이로부터 불과 50년 후 일본 해군은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다. 20세기 후반 폐허 상태의 한국이 수십년 만에 세계 1위의 조선 대국이 된 것에 견줄 만한, 경이로운 일이다. 그다음은 인재등용이다. 그는 신분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이 있으면 과감히 발탁했다. 그 수도 엄청났다. 이 시기 그가 발탁한 인재들이 그 후 막부의 눈부신 개혁정책을 이끌었다. 서양서적 번역기관(번서조소)도 만들어졌다. ‘번역 대국’ 일본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일본 근대화의 기초는 사실 이 시기 막부가 놓은 것이다,
아베는 1857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로주로 일한 지 14년 만이었다. 그는 즉시 통상을 개시하는 데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일본이 결국 그리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찰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자기 자리를 홋타 마사요시에게 넘겨줬다. 홋타는 일본이 해외무역을 감행해 그 이익으로 강병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래서 ‘서양마니아(난벽·蘭癖)’로 조롱받던 인물이었다. 이런 정치인, 우리도 갖고 싶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