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밀이는 남탕에서 시작됐다?

■국립민속박물관 '목욕탕보고서'
1968년 이전 '이태리타올' 특허 등록
70년 세운상가 男사우나서 때밀이 등장
신라 때 '더러움 씻는 의례'서 시작한 목욕
100여년 전엔 '유흥장소'로 이용되기도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장수탕과 천일탕의 굴뚝.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여성사우나탕의 경우는 아니지만 때밀이에 몸을 맡기고 있는 남성사우나탕의 풍경에는 ‘편한 세상이기는 하다만’ 때밀이의 앞벽에 붙은 ‘직업에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는 표어가 이 직업인들에게 격려가 되는 것이나 몸의 때까지 남에게 밀게 하는 태평이 아무래도 낯설다.”

우리나라 만의 독특한 목욕 문화인 때밀기가 언제, 어떤 이유로 시작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1970년 10월 28일자 한 일간지에서 세운상가의 남성사우나탕을 묘사한 이 같은 기사를 보면 여탕보다 남탕에서 먼저 때를 미는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론된다. 때를 밀 때 사용하는 ‘이태리타올’은 이미 1968년 이전에 특허등록이 됐다. ‘목욕용 접찰장갑’이라는 게 공식 설명이다. 부산에서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김필곤이라는 사람이 비스코스레이온 소재를 꼬아서 제작했는데, 국내산 원단에 이탈리아산 실 꼬는 기계인 연사기와 염료를 사용했기에 ‘이태리타올’이라 이름 붙었다고 전한다. 1980년대 후반에는 손닿지 않는 등의 때를 밀 수 있는 ‘자동 등밀이 기계’가 발명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근현대 한국인의 신체관리 변화양상을 조망한 ‘목욕탕’보고서와 동아시아 부엌생활문화를 분석한 ‘한국의 부엌’, ‘중국과 일본의 부엌’을 최근 잇달아 발간했다. 아파트 생활이 늘면서 대중목욕탕이 사라지고 입식 부엌으로 획일화된 상황에서 오늘날 생활문화의 근간을 짚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고대 로마사를 목욕탕 문화를 통해 유추하듯, 목욕탕에 대한 관념 변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효소왕 죽지랑 편에 ‘관념적 더러움을 씻어내는 의례’로서 목욕이 등장한다. 명령을 어기고 도망간 ‘익선’이라는 자를 대신해 맏아들을 잡아와 성 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다는 내용이 우리나라에 전하는 가장 오래된 목욕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서 씻어낸 것은 명령 불복종에 대한 죄를 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여름에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시내 가운데에서 한다. 남자와 여자가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글이 ‘고려도경’에 적힐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목욕문화는 ‘은밀하게’ 바뀌어 단오·유두절·복날 등 계곡에서 물맞이를 할 때를 제외하면 목욕은 남에게 보이지 않게 했다.

일제강점기에 목욕하는 남자를 촬영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유리건판 사진.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대중목욕탕은 1821년 중국에서 유입된 콜레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한 이후 ‘세균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하여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계몽활동이 퍼지며 늘었다. 이후 일본인에 의해 목욕문화가 전해지면서 1901년 8월 황성신문에는 “무교동 취향관에서 음력 7월 17일부터 목욕탕을 정결히 수리하고 새로 한증막을 처음으로 설치했으니 여러분들이 찾아오시기를 희망합니다” 라는 광고가 실렸다. 서울 청계천변의 취향관은 1903년 말 같은 신문에 “목욕탕과 내외국 요리를 재편했으니 여러분들이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라고 다시 알렸다. 당시 목욕탕은 몸을 씻을 뿐만 아니라 음식점 기능까지 했다는 뜻이다. 당시 목욕비는 지금의 1만 원 정도인 10전으로 고가였기에 목욕탕은 위생보다는 유흥을 위한 장소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1934년에는 “공중목욕탕이 시내에 드문드문 생기게 된 것은 한 20여 년 전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때쯤은 목욕탕에 가는 사람은 바람난 사람으로 인정하였으므로 목욕탕에나 좀 가려면 몰래몰래 숨겨 다니던 때와 지금은 비할 때가 아니나 가끔 엄청난 일을 목도하게 되는 까닭에…”로 시작하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다.

대중목욕탕 전경,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의 민가 부엌. /사진제공=국립민속박물관

부엌 또한 문화사를 반영한다. 한국의 부엌은 낮게 시작해서 점차 높아지는 식으로 변화했다. 한국의 전통 주거는 부엌 부뚜막에 불을 지피면 방의 구들까지 동시에 데워져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구조다. 아궁이는 방보다 낮게 있어야 했고 부엌 바닥도 지면보다 더 낮았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엌은 점차 ‘입식화’ 됐다.

부엌은 자연환경도 반영하는지라 중국 산시성 일대의 동굴집인 야오둥(窯洞)는 벽 구분이 없어 부엌도 따로 없는 형태다. 일본 규슈에는 천연 증기를 활용한 조리시설인 증기 부뚜막 ‘스메(スメ)’를 사용하는 지역들이 있다. 가고시마현의 우나기 마을은 유황 증기와 부뚜막을 연결해 사용하는 탓에 전자제품의 수명이 단축되고 자주 교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 2011년부터 생활문화와 관련된 보고서 발간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전시 및 강연 프로그램과 연결해오고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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