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오팔카의 ‘1965/1-∞ Detail 1503485-1520431’(왼쪽)와 작가의 초상사진.
폴란드 태생의 현대미술가 로만 오팔카는 서른 네 살이던 1965년부터 196×135㎝ 크기의 캔버스에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깨알같은 크기로 1,2,3… 숫자를 적었다.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숫자를 읽어가며 음성을 녹음했다. 그렇게 화폭 하나를 다 채우면 흰 색 셔츠를 입고 무표정하게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수행적인 이 작업을 무려 45년 이상 지속했다. 유한한 생의 인간이 무한한 수를 기록하는 일에 도전한 ‘1965/1-∞’라는 제목의 연작은 2011년 작가의 죽음에서 멈췄다. 비로소 완성된 것인지 영원한 미완인지 모를 작업에는 흘러가는 시간이 담겼다. 같은 셔츠, 같은 표정의 초상사진들에서 늙어가는 화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관악구 서울대학교 미술관 전시장에 오팔카의 ‘1965/1-∞ Detail 1503485-1520431’이 걸렸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숫자 1503485에서 시작된 약 2만 개의 연속된 수가 적혀있다. 회색 바탕 위에 줄지어 선 숫자들은 별 무리처럼 아름답게 보이다가도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질 인생같이 아련하기도 하다. 나란히 전시된 작가의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서울대미술관의 기획전 ‘시간을 보다’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시간을 이미지로 포착하고 시간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아낸 작품들을 선보인다. 국내외 작가 17명의 작품 약 80점이 전시중이다.
구본창 ‘비누 26_2007’ /사진제공=서울대미술관
구본창 ‘비누 24_2006’ /사진제공=서울대미술관
구본창 ‘비누 07_2006’ /사진제공=서울대미술관
오팔카의 작품 맞은 편은 사진작가 구본창의 ‘비누’ 연작이다. 세련되게 정제된 추상화 같지만 닳고 쪼그라들고 부서져 가는 다양한 종류의 비누들을 촬영한 작품이다. 비누에게 있어 시간의 흐름은 마모와 소멸의 과정이지만, 은은한 비누 향처럼 작품은 ‘실재’ 이상의 예술적 의미를 드러낸다.
정재호 작가는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의 흔적을 낡은 건축물로 기록한다. ‘정릉스카이아파트’ ‘소공로93-1’ ‘건국빌딩’ 등 한때 최신식이던 건물의 낡은 현재가 압축적 근대화에 대한 비판과 질문을 함께 던진다. 지우개 찌꺼기를 산더미처럼 모아 만든 홍희령 작가의 설치작품에서는 무수히 들인 시간과 공이 느껴진다. 작가에게 ‘지우개’란 현대인들의 마음의 고통을 해소해 주는 존재로, 책상을 지우개로 지워가는 관객참여형 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이현우 작가의 풍경은 특정 공간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통해 찰나의 시간과 일상의 특별한 순간의 교점을 보여준다.
정재호 ‘소공로 93-1’ /사진제공=서울대미술관
윤동천 서울대미술관 관장은 “시간을 바라보고 포착하려는 노력은 창작행위의 가장 근본적 욕망”이라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영원’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시간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3월12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기획전 ‘시간을 보다’ 전시 전경. /사진제공=서울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