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만 견딜 수 있으면 15억원이 넘는 아파트를 가진 사람들은 나라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 인정받고 사는 것 아닙니까. 9억~15억원 아파트 보유자는 그 다음 계급, 9억원 아래라도 서울이나 근교 신도시에 아파트를 갖고 있다면 중간 이상급 계급은 되겠죠. 규제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집값에 따른 현실 차이를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익명을 요구한 전문가)
금액대별로 대출 규제를 강화한 ‘12·16 대책’ 이후 부동산 업계에서는 ‘부동산 카스트’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빗댄 말이다. 우리나라 부동산에는 △15억원 이상 주택 소유자 △9억~15억원 소유자 △9억원 이하 소유자 △무주택자라는 ‘한국판 카스트 제도’가 도입됐다는 게 그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 정부 들어 18번의 대책이 나올 동안 다양한 신조어가 양산됐다. ‘강남 대 비강남’이라는 프레임을 넘어 부동산 계급론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 한 전문가는 “정부의 대책을 보면 초기에는 다주택자 대 비다주택자, 이후에는 무주택자와 1주택자, 현재는 고가 주택과 중저가 주택 등 특정 기준과 지역을 나누고 있다”며 “이렇게 나누다 보니 연령·계층·지역별 갈등은 더 심화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 급기야 나온 한국판 부동산 카스트=부동산 카페에는 ‘부동산 카스트’를 빗댄 글들이 적지 않다. 무주택자는 ‘노비’, 9억원 이하는 ‘상민’, 9억~15억원은 ‘중인’, 15억원 초과는 양반이라는 글도 그 중 하나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값을 기준으로 강남권은 양반, 지방 소도시는 노비 등으로 구분한 글도 찾을 수 있다. 참여정부 때 버블세븐을 빗대 현 정부에서는 ‘노블세븐(강남 4구+ 마·용·성)’이 나왔다. 노블세븐이 이제는 부동산 계급으로 확산되고 있는 모양새다.
이 외에도 18번의 대책이 나올 동안 적지 않은 신조어가 나왔다. 이들 신조어도 하나같이 갈등의 골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규제에서 영향을 덜 받는 부자들이 거리낌 없이 부동산을 싹쓸이하는데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청약조차 포기하는 계층도 나타나고 있는 모습이 신조어로 탄생한 것이다.
우선 무순위 청약 물량을 쓸어 담는 ‘줍줍족’은 현금 부자들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정부의 분양가 규제로 로또 아파트가 쏟아지자 청약시장으로 사람들이 대거 몰리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투기 세력이 몰린다며 대출 및 청약 규제를 강화하면서 당첨을 받기 어렵게 해놓았다. 여기에 난수표 수준의 청약 요건 탓에 단순 실수로 청약 당첨 기회를 놓친 피해자들도 무수히 생겨났다. 현금 부자들이 이 같은 무순위 청약 물량을 쓸어가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최대 인기 신조어인 ‘똘똘한 한 채’도 부자들의 사치다. 이 의미는 다주택자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여러 집보다 똘똘한 한 채가 낫다는 뜻이다. 지방 부자들까지 앞다퉈 서울 강남권 등 알짜 아파트를 구매하는 중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달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택시장 안정화 방안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을 하고 있다./서울경제DB
◇ ‘청포족·몸테크·영끌’… 힘겨운 사투=반면 한쪽에서는 부동산에서 밀려나는 계층들의 몸부림을 담은 신조어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청약 포기자’를 뜻하는 ‘청포족’이다. 새 아파트 경쟁률이 치솟으면서 당첨 가점도 상승하고 있다. 20~30대는 애를 써도 당첨 받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이들 젊은 계층은 스스로 ‘청포자’라고 부른다. 가능한 돈줄을 모두 동원해 집을 사는 행위를 뜻하는 ‘영끌’도 비슷하다. 금융권은 물론 친척·친구 등 사방팔방으로 도움을 받아야 간신히 집을 살 수 있다. 그나마 이제는 이 같은 ‘영끌’도 더 어려워졌다. 대출 규제가 더 세졌기 때문이다. ‘영끌’로 서울에서 6억원대 집을 산 한 30대는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 집을 산 게 행운”이라고 말했다.
‘몸’과 ‘재테크’의 합성어인 ‘몸테크’도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부족하다 보니 나온 재테크 기법이다.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기대하고 불편함을 무릅쓰고 낡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젠가 시세차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의미다.
부동산 대책의 부작용을 담은 신조어는 또 있다. 양도소득세가 하도 복잡해 세무사조차 포기했다는 ‘양포세’도 그 중 하나다. 상한제 시행 이후 ‘강남 불패’와 비슷한 ‘신축 불패’도 예외는 아니다. ‘부린이’, 즉 부동산과 어린이를 합친 말로 초보자를 말하는 신조어도 부동산 규제가 만들어 낸 단면 중 하나다.
◇ 추가 대책 예고...갈등은 더 커질 것=이런 가운데 정부는 조만간 19번째, 20번째 추가 대책을 내놓겠다고 공언했다. 핵심은 규제 그물망을 금액대 및 지역별로 더 촘촘하게 짜는 것이다. 주택담보 대출금지가 15억원 초과에서 9억~15억원대로 낮춰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수요 억제 정책으로는 집값을 안정화시키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없어서다. 결과적으로 풍선효과만 더 키우며 또 다른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갈등의 골만 더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장재현 리얼투데이 리서치본부장은 “실수요자들이 대출을 받아 집 한 채를 구입한 뒤 자산을 증식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이런 진입 시도 자체가 묶였다. 여기에 강남과 비강남 등 지역별 격차까지 더 벌어졌다”며 “정부가 주택 자산에 따른 ‘계급화’를 막기 위해 규제를 폈지만 정작 실수요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정부가 바라보는 시선과 시장이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탓”이라고 지적했다. /진동영기자 j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