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정복 군주 메메트 2세 등극

1451년...유럽에 절망 안긴 정복왕




1451년 2월3일, 메메트 2세가 오스만튀르크 술탄 자리를 물려받았다(즉위식은 2월18일). 당시 나이 19세. 비잔틴제국을 비롯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은 내심 마음을 놓았다. 무엇보다 무라드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반겼다. 오스만의 6대 술탄인 무라드 2세는 열세였던 비잔틴제국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굳히고 발칸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을 복속시켰던 군주다. 메메트 2세는 그의 셋째아들로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렸었다. 모친도 이탈리아계 노예 출신 후궁이었지만 형들의 잇단 죽음으로 권좌에 올랐다.


실은 두번째 등극이었다. 갑자기 은퇴와 은둔생활을 선언한 무라드 2세가 양위하는 바람에 12세에 임시 술탄에 오른 적이 있다. 비잔틴제국 등은 그를 대수롭지 않은 애송이로 여겼다. 마음이 바뀐 부친이 술탄 자리에 돌아와 14세부터 사실상 감금상태에서 방탕하게 생활했기에 ‘향락에 물든 탕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놓았다. 유럽인들의 기대는 짧게 끝나고 긴 절망이 찾아왔다. 젊은 술탄이 냉정한 계산으로 끈질기게 유럽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36명에 이르는 역대 오스만제국 술탄 가운데 ‘정복왕’으로 기억되는 인물은 메메트 2세뿐이다.

즉위 다음해인 1543년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다. 비잔틴제국에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헝가리인 기술자 우르반이 설계한 초대형 대포의 전략적 가치를 단박에 알아본 메메트 2세는 병참선을 먼저 구축하고 정보를 확인한 뒤 병력을 깔았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은 우르반의 대포에 허물어지고 내항 격이던 금각만은 하룻밤에 급조한 레일을 타고 산을 넘어온 오스만 함선 72척에 뒤덮였다.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거죽이나마 남아 있던 로마의 숨통을 끊은 그는 49세에 사망하기까지 강역을 넓히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오스만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메메트 2세의 유산은 오늘날 터키공화국에까지 이어진다.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는 두 번째 다리의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정작 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곳은 터키보다 유럽이다. 오스만에 눌린 유럽은 떨었지만 공포에 젖지는 않았다. 비잔틴제국의 학자와 서적이 유럽으로 대거 넘어가 지식혁명이 시작되고 유럽 각국은 오스만을 우회할 교역로를 찾으러 거친 바다로 앞다퉈 떠났다. 유럽이 주도하는 근대화와 세계화의 씨앗이 뿌려진 것도 이 시기다. 아널드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란 도전과 응전의 소산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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