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경의 1936년작 ‘가을볕’
지난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는 북한의 미술작품 22점이 전시됐다. 국내에서 북한미술 전시가 열리는 것은 물론 월북미술가들에 대한 언급도 1988년의 해금(解禁) 이후부터 가능해졌다. 그 전까지는 정보를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해금 이후 간간이 소규모의 북한미술 전시가 열리기 시작했다. 북한의 현대미술 전시는 ‘예술이냐 선전이냐’의 논란을 야기하면서 호주, 오스트리아, 미국 등 해외에서도 여러 번 있었다. 북한미술에 대한 궁금증은 조금 풀렸으나 아직도 한국전쟁 전후에 월북한 미술가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한 편이다.
해방 이후 좌우익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남쪽의 미술가들이 북으로 가기 시작한 것은 1946년부터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하던 김주경(회화), 조규봉(조각), 김정수(조각) 등이 그해 북으로 갔다. 김주경은 인상주의에다 주관적인 색채가 가미된 야수주의 양식에 매료돼 밝은 색채로 야외의 신선한 광선이 가득한 풍경을 그렸던 화가다. 동경미술학교의 도안과 출신인 그는 월북 후 북한 국기를 디자인하고 평양미술전문학교의 학장이 됐다. 조규봉과 김정수는 1946년 북한의 모란봉 해방탑 건립과 관련해 초청을 받고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경우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에 있던 화가 이쾌대는 경찰에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반공포로 송환 시 북을 택해 갔다고 한다. 수용소에 있던 당시, 부산의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한국현대작가전을 미국 장교와 함께 보러왔더라는 증언도 있다. 이쾌대는 월북작가들이 해금되자 그동안 부인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작품들을 1990년 신세계 미술관의 전시에 처음으로 내놓아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월북 전인 1948년에 그린 여러 군상 작품들의 웅장한 구성이나 드라마틱한 설정은 그가 당대 최고의 화가였음을 인정하게 한다. 북한에서 그린 ‘3.1 운동’(1959년 개작)과 같은 작품도 역사화를 집중력 있게 그릴 수 있는 솜씨가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여러 중견 미술가들의 경우 월북의 이유가 다양하고, 어떤 경우는 아직도 당시의 상황이 불분명하다. 북으로 간 미술가들의 수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나 김주경이나 이쾌대 외에 김용준, 길진섭, 정종여, 리석호, 배운성 등 어느 정도 국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미술가들만을 고려해도 40여 명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중 김용준, 길진섭은 동경미술학교, 이쾌대는 일본 제국미술학교, 그리고 정종여는 오사카 미술학교 출신이었다. 북한의 현대미술은 바로 이 중견 미술가들이 월북해 그곳에 이미 정착하고 있던 미술가들과 같이 활동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정관철의 1948년작 ‘보천보의 횃불’에는 김일성의 젊은 모습이 등장한다.
옛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처럼 북한에서도 해방 직후부터 지도자의 모습을 회화나 조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원래 평양 출신으로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있던 정관철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 그의 초상화를 그려 걸었고 이것이 김일성의 첫 번째 초상화라고 알려진다. 1945년에는 레닌과 스탈린, 김일성의 초상화가 무려 9만 점이 제작됐고 1946년에는 25만 점이 그려졌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정책적으로 미술가들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숫자다. 1947년에는 평안남도 남포시에, 1948년에는 평양의 만경대 혁명 학원의 청사 앞에 김일성 동상이 세워졌다.
남쪽에서 미술대학이 신설된 것과 비슷하게 북에서 평양미술전문학교가 1947년에 설립됐고 1952년에는 평양미술대학이 됐다. 김주경이 교장이었고, 교수진도 대부분 월북미술가였던 조규봉, 김정수, 길진섭 등이 포진했다. 이외에 원래 북한 출신이었던 화가 문학수, 최연해, 한상익, 조각가 문석오도 합류했다.
북한에서 초기 미술교육의 모델은 소련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였다. 스탈린의 초상화도 그린 바 있는 소련 화가 콘스탄틴 이바노비치 피노게노프가 1949년 ‘조쏘문화협정’에 의해 평양을 방문한 것이 북한 미술계의 방향 설정에 큰 자극이 됐다. 평양미술학교를 다니다 1950년에 월남해 그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화가 김태는 이 학교에 회화과, 조각과, 사범과, 도안과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실기 외에 마르크스 레닌주의, 변증법, 유물사관의 인문교육을 받았으며, 러시아 미술은 정규 과목인 데 비해 다른 서구의 미술은 배우지 않고 교수들이 개인적으로 언급할 정도였다고 말한다. 평양미술대학 교수진들도 새로운 체제와 내용에 적응하려 했다. 이들은 서구 유럽 미술의 퇴폐적 요소를 말소하고 소련의 미술을 섭취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북한에서 미술의 지침이 확고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경부터였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미술대학에서 교육받은 졸업생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에 김일성은 ‘조선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강령적 교시’에서 조선화를 민족적 형식으로 보고 주체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화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동양화라는 용어는 사라져버렸다. 유화가 배척된 것은 아니었지만 서양에서 온 재료와 방법이라는 이유에서 유화보다는 붓과 먹으로 그리는 조선화가 장려됐다. 이들은 조선화의 약점이 색채에 있다는 인식하에 선명하고 힘 있는 색채를 사용하도록 권장 받았고, 주제도 역사화, 전투의 장면, 노동자나 농민들의 모습 등으로 광범위해졌다. 특히 화가 정종여는 조선화의 이론적 체계를 집필해 큰 영향을 미쳤다. 남쪽에 있을 때 이상범에게 사사 받은 경험도 있는 정종여는 ‘몰골 기법’이라는 방법으로 인물들의 형태나 정서를 표현하고, 함축적인 필선이나 먹의 농담, 원근법적인 배치로 공간감을 잘 살려냈다.
정종여의 1961년작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사실 김일성은 미술에 대한 교시를 내릴 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았다. 이렇게 국가 주석이 예술에 대해 지침을 내리는 것은 국가가 작품의 주제나 내용을 통제했던 소련 스탈린의 예를 따른 것이다. 1930년대 초에 스탈린은 미술이 인민을 교육하고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미술작품에서 사회주의와 공산당의 시각,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이상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월북 미술가 중 정종여처럼 말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화가들도 있지만 이쾌대나 배운성의 경우는 그렇게 잘 풀리지 못했다. 이쾌대는 1950년대까지의 작품들은 알려져 있으나 1962년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고, 1965년에 죽었다. 독일 등 유럽에서 활약하다 귀국한 후 월북한 배운성은 천리마 운동이 시작되는 1961년 무렵부터 운신이 어려워진 것으로 알려진다. 김용준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전통에 대한 관심을 갖고 1930년대 말 수묵화로 방향을 바꾼 화가였다. 그는 문인화적인 담백함과 시서화(詩書畵)를 강조함으로써 해방 이후 재직한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신문인화의 기초를 닦았다. 6·25 전쟁이 나자 가족을 데리고 월북한 후에 곧 평양미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민족미술을 강조하고 ‘조선미술사’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의성을 존중하는 수묵화가였던 김용준은 채색화가 국가의 미술로 발전하게 되고 수묵화가 사대부나 문인 취향의 계승으로 비판을 받으면서 입지가 좁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몇몇 미술가들의 말년에 대해서는 숙청, 자살, 등 확인되지 않는 소문들만이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사학자·前 국립중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