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규 한국외교협회장 /성형주기자
“전염병을 대함에 있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끝난 뒤에도 한중관계는 계속됩니다. 한국이 모기 잡는 데 도끼를 썼다는 인식을 중국에 심어주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닙니다.”
이준규 (67·사진) 한국외교협회장은 지난 7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신종 코로나 대책과 관련해 입국제한 조치 중국 전역 확대 등 커지고 있는 혐중정서를 우려하면서 이처럼 밝혔다. 그는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뜨거운 감성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신중 코로나 사태를 둘러싼 대중외교에 대한 이 회장의 생각은 그가 외교관으로 평생을 헌신하면서 좌우명으로 삼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논어’에 등장하는 화이부동은 타인과 사이좋게 지내지만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외교는 상대방과 치열하게 싸워 뭔가를 쟁취하는 게 절대로 아니라 상대방을 설득해 우리 입장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러려면 우선 상대방과 친해지고 상대방이 나를 신뢰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연히 나도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화(和)’”라며 “또 각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니 서로 같아져서는 안 되는 것이 ‘부동(不同)’”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화이부동의 관점에서 언론과 정치권을 중심으로 입국제한 조치를 중국 전역으로 확대하자는 대중 강경 대응책 등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는 혐중정서 확대·재생산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신종 코로나 사태의 조기퇴치에는 한중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게 중요하고 입국제한 조치는 국제적 기준이나 우리의 사정을 냉정하게 판단해 결정하면 된다”며 “‘대중 저자세 외교’ 프레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신종 코로나 사태 해결과 중국과의 관계 모두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웃국가인 만큼 극단적인 입국제한 정책은 최후의 보루로 고려해야 한다고 이 회장은 다시 강조했다. 실제 중국 전역을 입국제한 조치 대상으로 지정한 미국과 달리 중국과 이웃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후베이성에 국한해 입국제한 조치를 시행한 것도 신종 코로나 퇴치 이후 대중관계를 고려한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총수출의 21%를 차지했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34.4%를 점유하고 있다.
2002년 시작된 중국 사스 사태 당시 주중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이 회장은 “사스 때도 우리 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았을 시절이지만 한중관계를 많이 고려했다”며 “다른 나라가 대사관 철수 조치를 취할 때 한국 정부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외교를 했다. 이는 사태가 일단락된 후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를 중국에 심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주중대사관 총영사 시절 중국 내에서 탈북자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때 한중 간에 형성된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이들의 국내 송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신종 코로나 문제를 넘어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노력만으로는 어렵고 중국이 신종 코로나 사태, 남북관계, 미중 간 문제 등 외교현안을 중국의 관점에서만 보고 일방적으로 한국을 몰아붙이면 안 된다”며 “한국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된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 사태 외에 사드 및 한한령 문제 등 중국 같은 큰 국가와 교섭할 때는 우리만의 분명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회장은 귀띔했다. 그는 “중국에서 근무해본 경험에 비춰볼 때 대국과의 외교일수록 우리가 당당하게 원칙을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며 “우리 스스로 원칙을 지키고 상대방이 원칙을 벗어날 때 당당하게 시정을 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미중 간 갈등이 날로 격화하는 상황인 만큼 국제정세와 타국의 외교정책 등을 면밀하게 분석해 분명한 원칙을 세워야 강대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위기에 몰리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미중 패권전쟁 속에 전략적 모호성이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한미동맹이 매우 중요하지만 미국도 중국의 이웃국가인 우리 입장을 이해하고 있다”며 “미국과 끊임없는 대화로 설득하면 큰 문제 없이 한미동맹을 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준규 한국외교협회장./성형주기자
주일본대사관 참사관과 일본 대사를 지낸 이 회장은 1965년 수교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은 한일관계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2월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대화를 통한 해결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두고 양국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최근 한일정상회담도 했고 양국 간 실무적 협의도 진행되고 있어 한일관계에 숨통이 조금 틔었다”면서도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은 시작됐는데 한일 양국이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아직 길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어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비판하고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으로 한일 양국에 도움이 되는지 해결책을 찾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한일 갈등의 경우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 문제라며 정치적 부담이 큰 정부보다 사회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소통을 통해 오해를 푸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국 정부는 여론 등 국내의 정치적 어려움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해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학계·민간인·지식인들이 서로 지혜를 모아 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해 근본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대일관계에서 소통과 더불어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FTA는 일반적으로 국가 간 경제협력으로 알려졌지만 현실적으로는 협정을 맺은 나라와의 전반적인 관계 강화를 의미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회장은 “FTA를 통해 얻는 이익을 말할 때 경제적인 것에 국한해 미시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협정을 맺은 국가 간의 전반적인 정치관계 및 안보협력 등 광범위한 관계 발전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정확한 계산서가 나온다”고 했다.
이 회장이 한일수교 이후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꼽은 장면도 2005년 한일 FTA 체결 무산이다. 그는 “FTA는 단순히 경제면에서만의 협력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양국의 종합적인 협력의 상징이기 때문에 일본과의 FTA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한일 FTA 추진은 전반적으로 한일관계 개선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준규 한국외교협회장./성형주기자
주인도대사를 지낸 이 회장은 신남방 및 신북방정책 등 정부의 외교 다변화 추진을 지지하면서도 인도의 중요성이 간과됐다고 아쉬워했다. 인구 13억명을 넘어선 인도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풍부한 노동력을 갖춘 잠재력이 큰 소비시장이다. 특히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집권 이후 강력한 개혁정책을 통해 인도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전 세계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은 이미 인도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1980년대부터 인도 시장에 진출했고 중국도 2000년대 들어 인도와의 경제교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 회장은 “인도는 아세안 전체와 비견될 만한 중요성을 가졌고 정치적으로는 아세안보다 훨씬 중요한 국가라고 볼 수 있다”며 “신남방정책에서 인도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인도에 대한 인적·물적 투자를 늘려갈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남방정책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해진 공적개발원조(ODA) 정책에서도 우리만의 특성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운용할 수 있는 ODA 규모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만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우리의 경험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ODA는 우리나라가 특히 경제발전 초창기에 외국의 원조를 받은 경험이 있고 우리의 발전이 외국의 원조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에 경제적 여력이 생긴 지금 최대한 ODA 규모를 늘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ODA 분야에서 우리가 선진국들과 규모 면에서 경쟁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됐다는 노하우를 토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ODA를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리나라의 ODA 규모는 국민총소득(GNI) 대비 약 0.1%로 이는 일본(0.2%), 독일(0.6%), 영국(0.7%)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이 회장은 한국의 외교범위가 확대된 데 따른 고질적인 인력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포팅 시스템’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예산 문제로 외교관을 늘리기는 어려운 만큼 이들을 지원하는 직원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서포팅 스태프에 비해 외교관 숫자가 많다”며 “인건비가 싼 스태프 한 명을 붙여주면 외교관의 업무 효율성이 굉장히 높아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정리=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54년 충남 공주 △ 경기고, 서울대 법대 △ 외시 12회 △1984년 주유엔 2등서기관 △1996년 주일본 참사관 △ 2001년 주중국공사 참사관 △ 2004년 재외동포영사국장 △ 2006년 주뉴질랜드 대사 △2010년 외교안보연구원장 △2012년 주인도대사 △2016년 주일대사 △ 2020년~ 한국외교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