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재(오른쪽) 디자이너의 작업공간에서 두 디자이너와 만복이.
우리는 콘텐츠를 시각적으로 읽어내고 표현하기 위해 디자이너가 제작한 서체의 도움을 받는다. 디자이너의 개성이 묻어있거나 감성이 들어간 특유의 서체들은 독자가 책을 읽을 때 읽는(reading) 행위보다 보는(looking) 행위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양장점’은 서체를 제작하는 소규모의 서체디자인 스튜디오로서 최근 ‘펜바탕’ 시리즈를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는 장수영, 양희재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다. 고양이를 키우는 장수영 디자이너는 한글을 다룬다. 강아지를 기르는 양희재 디자이너는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한다. 둘은 작업실을 같이 쓰지 않고, 생활 습관도 다르다.
◇작업실 이야기-따로 또 같이
Q. ‘양장점’의 시작이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장: 저는 원래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 서체 디자이너로 근무했고요. 독립 후 첫 번째 프로젝트였던 ‘펜바탕 Regular’의 로만체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던 시점에 양희재 디자이너가(이하 양)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양: 그래픽 디자인을 하면서 해외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어요.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다 보니 제가 주로 만든 결과물들이 활자를 위주로 한 그래픽이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를 고를 때 서체디자인이 특화되어 있던 곳을 가게 되었죠. 스위스 로잔에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장수영 디자이너(이하 장) 대학 후배예요. 학교 사람들끼리는 장이 서체 디자인을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마침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고 한국에서 무얼 할지 거취를 정해야 하는 시점이었죠. 서로 친하지 않은데 제가 먼저 연락했어요. 원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웃음). 마침 장도 저를 필요로 했고요.
장: 양에게 한국 오지 말고 거기서 어떻게든 버티라고 했어요. 여기 힘들다고(웃음). 양이 로잔예술대 석사과정에서 진행했던 작업물들을 보고 저에겐 없는 장점들을 발견하면서 함께 하자고 제안했어요. 서로의 니즈와 타이밍이 맞았던 거죠.
Q. 왜 이름이 ‘양장점’이죠?
장: 저희 이름이 양희재, 장수영이거든요. 각자의 성을 따서 대학교 친구들이 별 의미 없이 붙여준 이름인데, ‘양’과 ‘장’이 만든 서체를 판매하는 ‘상점’이라는 저희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이름인 것 같아 큰 고민 없이 사용하게 되었어요.
장수영 디자이너의 작업공간.
Q. 두 분이 디자이너 듀오이지만 작업은 각자의 공간에서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체디자인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장: 처음에는 인천에서 1년 동안 함께 살았는데요. 굳이 같은 공간에서 작업할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가끔 잘 살아있나 확인하는 정도네요(웃음). 한글과 라틴 알파벳의 물리적인 양도 차이가 있고, 둘의 사이클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둘 중에 한 섹션이 나와야 그다음 영역 작업이 시작될 수 있거든요.
양: 처음 양장점을 시작할 때는 같이 살다가, 그다음엔 작업실만 공유하고, 점점 분리되는 식으로 독립했어요. 제가 한국에 돌아와서 서로 잘 몰랐을 때 동거했었죠.
장: 본인 기준에서의 선의를 상대방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잖아요.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작업 스타일뿐 아니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양보와 배려를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함께 사는 동안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습니다. 하하.
양: 함께 시작했다가 서로 점점 분리되는 거죠. ‘따로 또 같이’ 개념으로요. 저는 굉장히 어지르는 스타일이고 장은 깔끔한 스타일이에요. 반려동물에서도 극단적으로 드러나죠. 저는 강아지, 장은 고양이. 하지만 작업적으로는 매우 잘 맞아요.
양의 공간.
Q. 어떻게 각자의 공간을 구하셨나요? 그 공간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양: 저는 녹사평에 살다가 남산 쪽으로 오게 되었는데요.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동네였어요. 요즘 크로스핏을 다니는데, 수업 끝나고 나면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죠. 예전에 장과 같이 살 때는 막막한 미래를 그리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지금은 작업 외 시간에 운동을 다니는 것이 일과입니다.
장: 다행히 양과 멀지 않은 장충체육관 쪽에 제가 원하는 구조의 집을 발견해서 최근 이사를 왔어요. 저는 격렬한 운동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로 집 앞 성곽길 산책을 하거나 맛집 투어를 다닙니다. 한글 서체 만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처절한 과정이거든요. 그래서 가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새벽에 바다로 드라이브를 가요. 일출을 보며 해변을 산책하기도 하고 맛집 투어를 다니기도 하죠.
◇작업 이야기-작품 속 시각 언어, 타이포그래피
양의 ‘Fifty(ECAL 석사과정 작업)’
양의 ‘Actual(ECAL 석사과정 작업)’.
양의 ‘It is My Private Toolbox(ECAL 석사과정 작업
장의 ‘격동고딕(산돌커뮤니케이션 재직 당시 작업)’.
장의 ‘본고딕(산돌커뮤니케이션 재직 당시 작업)’.
Q. 시각디자인과 출신 디자이너들 중에서 서체디자인 분야로 진출하는 디자이너들이 흔치 않은데요.
양: 한국에서 서체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저는 라틴 알파벳 디자이너라는 특수성이 있어서 전망이 밝지 않을까 생각해요. 평소 작업물에서 개인적인 관심 분야가 드러나는 법인데 그게 저는 서체 쪽이었거든요. 결국 관심 분야로 진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장: 저는 학부 시절에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봤는데, 대부분은 몸이 힘들거나 재능이 없다고 느꼈어요. 그러다가 타이포그래피가 디자인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tw’라는 학교 타이포그래피 소모임에 가입했습니다. 소모임 활동을 통해 글자를 그리는 작업에 차츰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4학년 때 서체 회사인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인턴 과제 겸 졸업전시 작업으로 ‘격동고딕‘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쪽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죠.
양장점의 ‘펜 시리즈’
‘펜바탕 Regular’
Q. ‘펜 시리즈’는 어떻게 기획하게 되셨나요?
장: 2014년도에 ‘방일영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한글 글꼴 창작지원금 수혜자 공모’에 지원하면서 ‘펜바탕 Regular’를 처음 기획하게 되었어요.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족 구성(공통 디자인 서체의 집합을 말한다. 보통 Weight의 개념에 따라 Light·Medium·Bold 등으로 나눠지며, 스타일에 따른 기준으로는 Condensed·Extended 등이 있다.)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양한 필기도구를 기반으로 한 ‘펜바탕’ 2종과 ‘펜돋움’ 2종의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양: 저는 개인적으로 호불호가 강한 사람이에요. 사실 ‘펜바탕’이 제 개인적인 취향과 맞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하나의 도전 같은 것이었어요.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스타일의 서체 작업을 맡아서 스스로 성장해 보고 싶었어요.
임소라 작가의 ‘서울, 9개의 선’
Q. ‘펜바탕’이 잘 어울리는 매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디에 쓰였을 때 가장 인상 깊으셨는지?
장: 개인적으로 ‘펜바탕’은 본문용 서체임에도 또박또박 쓴듯한 펜 글씨의 개성이 드러나는 감성적인 서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누군가에게 조곤조곤 말하는듯한 성격의 작업물에 쓰인 ‘펜바탕’이 저에게 더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하우위아’라는 독립출판사를 운영하시는 임소라 작가님이 ‘서울, 9개의 선’이라는 책에 ‘펜바탕 Regular’를 사용하셨고요. 최근 개봉했던 ‘윤희에게’라는 영화에도 크레디트로 ‘펜바탕 Regular, Semibold’가 등장합니다. 두 작품 다 앞서 말씀드린 관점에서 콘텐츠와 서체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느꼈어요. 제가 이 서체를 만들면서 상상했던 것들이 시각적으로 구체화 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양장점 펜바탕 전시회’ 포스터(그래픽디자인_신신)
Q.‘펜바탕’을 어떤 방법으로 홍보하셨나요?
양: ‘펜바탕 Regular’를 제작한 후 전시를 했어요. 스튜디오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첫 번째 전시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고생해서 만든 서체를 홍보하는 자리인 만큼 여러모로 공을 많이 들였는데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방문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전시의 인연으로 알게 된 디자이너들의 작업에 ‘펜바탕’이 사용되면서 자연스레 노출이 됐던 것 같아요. 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 ‘펜 시리즈’ 4종 후원을 진행하면서 홍보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요. 최근 기업의 전용서체 작업이 늘어나서 장의 체력 고갈이 극심한데요. 그로 인해 ‘펜 시리즈’ 제작이 많이 지체되고 있네요. 후원해주신 분들이 등을 돌리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장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Q. 다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서체 중 좋아하는 작품이 있을까요?
장: 한글 서체는 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제작기간이 긴 편이라 음악처럼 트렌드가 빨리 바뀐다거나 신작들이 마구 쏟아지는 느낌은 아니거든요. 그래서인지 서체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걸 만든 사람이 어떠한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하는지에 관심을 두는 편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류양희 디자이너, 윤민구 디자이너의 다음 작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양:저는 라틴 알파벳 담당이다 보니 유학 당시에 ’프랑수아 라포’라는 선생님이 만든 서체를 좋아했어요. 무색무취한 걸 좋아하는 편인데 그 서체가 제 취향에 딱 맞았어요.
양의 ‘Sfont(디자인 스튜디오 ‘슈퍼픽션’ 전용서체)’.
장의 ‘아이는 누가 길러요’ 제호레터링(그래픽디자인_일상의실천).
‘미스테리아’ 제호레터링(그래픽디자인_신덕호).
Q. 서체 외에 관심 있는 다른 디자인 분야가 있나요?
양: 저는 물건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어요. 친구 중에 공간 디자인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함께 프로젝트성으로 작업하는 것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형태의 오브제를 만들어 내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체를 디자인할 때와 비교하면, 세밀하게 봐야 하는 지점들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작업하기가 마냥 쉽지는 않은 것 같더라고요.
장: 최근 그래픽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하게 되면서 ‘내가 만든 글자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꾸준히 그들의 작업을 염탐하고 있습니다. 노년에 건물주가 되어 행복한 저를 상상하며 건축이나 인테리어 쪽도 종종 찾아보기도 하고요.
Q. 한글과 영문을 바꿔서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장: 저는 항상 있죠. 매번 저보다 빨리 작업을 끝내는 양을 보면서(웃음).
양: 저는 언젠가 시간이 주어진다면 저만을 위한 한글 서체 디자인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라틴 알파벳 디자인의 이론이나 작업 방식을 한글에 반영한 작업을요.
◇앞으로의 이야기-서체를 그리듯 영역을 그려나갈 듀오
양만복과 장치타.
Q. 시각디자인과 학생들 사이에서 레터링이 굉장히 인기인데요. 레터링에 비해 그 과정을 바탕으로 직접 타입 세트를 제작한다는 것은 들이는 품과 깊이가 매우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체디자인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장: 주어진 몇 글자를 디자인하는 레터링과는 달리 완성형 한글 서체 한 벌은 최대 1만1,172자에 해당하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숙련된 경험이 필요합니다.
제작 기간도 오래 걸리고 서체가 쓰이는 매체에 따라 고려해야 할 부분 역시 상당히 많죠. 그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만든 서체가 수익으로 연결되기까지는 폰트 기술, 마케팅, 유통, CS 등 제반 사항이 많기 때문에 개인이 활동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에요. 그래도 작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점점 나아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도전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양: 질문하신 것처럼 서체 디자인을 처음 접할 때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느낌에 부담감이 들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작업이 글자를 그리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것에 집중하게 된다면, 어느새 서체 디자이너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Q. 최근 서체디자인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 소식이 들려오는데요. 현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서체 관련 콘텐츠들을 통해 바라본 서체 시장의 미래는 어떨까요?
양: 최근에 다양한 시각적 결과물들이 대중들의 시각에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한 결과들의 반작용으로 비교적 덜 자극적인 성향의 서체 분야가 주목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제가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는 성격이어서 이러한 분석이 정확하게 맞는다고 할 순 없겠죠. 하지만 앞으로 서체 시장은 점점 규모가 커질 것으로 보이고요. 대중들에게도 서체디자인 분야에 대한 인식이 선명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장: 매체가 다양해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예전보다는 서체 관련 콘텐츠들의 노출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관련 전시나 강의도 많이 생겼고, 기업들이 배포하는 무료 서체도 많이 늘었고요. 그만큼 서체에 관심 갖는 사람도, 서체를 디자인하려는 사람도 많아진 것 같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보다 시장이 더 커져서 다양한 작업물들로 풍성해졌으면 좋겠네요.
/구선아 기자 schatzs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