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영철 제넥신 대표가 11일 경기도 성남시 코리아바이오파크 제넥신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성남=성형주기자
“미국 유학 시절에는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공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어떻게든 달성하려고 애썼습니다. 미국인 친구들보다 제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서인데요, 지난 30년간 이런 ‘헝그리정신’으로 살아왔습니다.”
학내 벤처에서 출발해 시가총액 1조원이 넘는 대한민국 대표 바이오 기업을 일군 성영철 제넥신 대표는 ‘헝그리정신’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지난해 말 4년 만에 대표이사로 복귀하며 임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는 ‘헝그리정신’이라는 말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는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실패만 하는 게 아니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혁신 신약 개발 완수의 필요조건으로 ‘헝그리정신’을 제시했다.
성 대표가 십수년 전에나 통할 법한 옛사람들의 말인 ‘헝그리정신’을 이 시점에 소환한 이유는 명확하다. 지난 1980년대 당시에는 낯설기만 한 ‘유전공학’을 들고온 유학파 성 대표의 지난 삶은 척박한 국내 토양 속에 신기원을 만들어내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과도 같았다.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한 그를 비롯한 분자생물학자들은 연구와 개발을 거듭하며 적극적으로 창업에 나섰다. 1996년 설립된 헬릭스미스와 마크로젠(1997년)·제넥신(1999년) 등 1세대 바이오 기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헝그리정신’으로 똘똘 무장한 이들은 이렇게 ‘K바이오’의 씨앗을 뿌렸다.
24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코리아바이오파크 제넥신 본사에서 만난 성 대표는 “사실 어렸을 땐 공부보다는 술자리를 찾아다니는, ‘헝그리정신’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학점은 ‘B’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런 그를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것은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어렴풋이 나눈 다짐들 덕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대학 진학률이 워낙 낮았던 터라 대학생이 특권층으로 꼽히던 때였다. 이 특권층이라는 의식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골똘히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했고 그때 ‘나는 이렇게 될 거야’라고 했던 다짐들이 쌓여 어느 순간 지금의 내 모습이 된 것 같다”면서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공부를 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결심을 ‘헝그리정신’과 함께 실행에 옮긴 것은 포항공과대 교수로 재직하던 때다. 성 대표는 당시 직원 세 명과 함께 학내 벤처를 꾸린 뒤 신약 개발에 나섰다. 동아제약과 녹십자 같은 내로라하는 국내 제약사들과 산학협력 과제를 수행했고 하나둘 결실을 쌓아갔다. 연구라는 일이 단순히 실험실 안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도 이때 갖게 됐다. 동아제약과 C형간염 진단키트를 만들어 사업화했던 것을 계기로 그는 이 회사로부터 투자를 받았고 제넥신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기업가의 길에 뛰어든다.
연구자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성 대표는 ‘헝그리정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절감한다. 조용한 연구실과 피 말리는 바깥세상은 너무도 달랐다. 투자 유치에 번번이 실패했고 ‘너무 사업을 모른다’는 지적도 쏟아졌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당장 돈이 되는 사업보다 패러다임(세계관)을 바꾸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소신을 지켰다. 성 대표는 “바이오베터(기존 신약의 효능을 개선한 개량신약)나 바이오시밀러도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었다”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라고 말했다.
성영철 제넥신 대표가 11일 경기도 성남시 코리아바이오파크 제넥신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성남=성형주기자
불안했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다. 제넥신은 자궁경부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돼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가 더 이상 듣지 않는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자궁경부암 치료 백신 ‘GX-188E’ 개발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미국 머크사의 면역관문억제제 키트루다를 병용투여하는 면역치료법에 대해 내년 조건부 허가 신청에 돌입할 계획이다. 조건부 허가는 암 등 중대한 질환과 희귀질환 치료제에 한해 임상 2상만으로 허가를 우선 내주고 이후 임상 3상을 진행하는 제도다.
‘패러다임 전환’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성 대표는 4년여 만에 대표이사에 복귀하기로 전격 결정한다. 백신 개발의 첫 번째 열매는 맺고 가겠다는 의지 표현이자 지난해 국내 바이오 업계의 잇단 임상 실패에 따른 위기감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헬릭스미스·신라젠 등 바이오 업계의 연이은 임상 실패로 바이오 관련주들이 줄줄이 급락한 가운데 제넥신 투자자들도 2018년 정점 대비 반토막 수준의 주가에 불만을 토로하기 이르렀다. 성 대표는 “주식 상장까지가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지만 시장 상황 등 변수가 발생했다”면서 “제넥신이 실제 열매를 맺는 모습을 한번은 보여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길어도 내년까지는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 대표는 제넥신을 철저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할 생각이다. 그는 “로켓을 우주로 보내려면 어느 순간 발사체 1단 로켓이 떨어져줘야 2단 로켓이 힘을 받고 결국 대기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서 “제넥신은 경영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지금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경영 방식이 5년, 10년 뒤에도 제넥신을 성장하게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문경영인에게 자리를 내주면 그는 원래 자리인 연구자로 돌아갈 계획이다. 대학원생과 교수를 활용한 산학협력 과제도 추진하고 있다. 성 대표는 “다음달 모교인 연세대에 직접 투자해 세우는 건물이 완공된다”며 “건물 내 개인회사인 ‘에스엘바이젠’을 차린 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후배들에게 신약 개발 현장을 직접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성남=이주원·우영탁기자, 사진=성형주기자 joowonmai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