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감산 거부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증산 계획을 밝히면서 촉발된 석유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14년에 이어 6년 만에 석유 전쟁을 재개한 이유가 그간 미국 셰일 업체에 빼앗긴 시장점유율 되찾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유가폭락은 6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 회의에서 러시아가 감산을 거부하면서 촉발됐다. 시장에서는 과거 2014년 산유국들의 감산 갈등의 불이 꺼지지 않은 가운데 러시아의 미국 견제 의도까지 더해진 만큼 해묵은 신경전이 쉽게 해소되기 힘들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산유국 갈등에 미국과 러시아의 패권 다툼까지 겹쳐 유가 하락 현상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경기침체의 골이 더 깊어질 것이라는 우려 목소리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9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24.6%(10.15달러) 떨어진 31.13달러, 두바이유는 15.7% 하락한 32.87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 불발 소식에 10.1%나 급락했던 전 거래일에 이은 약세가 지속되는 모습이다.
이번 원유가격 급락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과거 미국의 셰일 가스에 대한 사우디의 반발로 촉발된 2014년 유가 급락 시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2010년대 이후 미국이 셰일 가스와 셰일 오일 대량 생산에 성공하면서 셰일 오일의 배럴당 생산 단가는 평균 6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배럴당 100달러 수준이었던 당시 유가 흐름에 셰일가스와 셰일 오일의 생산은 시장 패러다임을 바꾸는 방아쇠가 됐다. 미국 셰일업계 위협에 대항해 사우디아라비아는 유가를 떨어뜨리는 벼랑 끝 전략을 선택했는데 그 이면에는 배럴당 30달러 수준인 사우디의 원유 생산비에 대한 자신감에 깔려 있었다. 당연히 사우디의 미국 셰일 컴퍼니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낙관했지만 결과는 모두에게 큰 상처로 귀결됐다. 미국 셰일업체는 일부 파산의 홍역을 앓았지만 사우디도 국가 재정이 크게 악화됐다.
이런 아픔을 겪은 사우디가 러시아에 감산 협조를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자국의 천연 가스 사업 확대를 견제하는 미국에 대한 불만 탓에 거부 카드를 내놓았다. 해묵은 산유국의 셰일 업계 견제에 미러 대결까지 겹치면서 이번 신석유 전쟁의 충격을 더욱 커질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사우디의 증산 결정도 추가 감산 제의를 거부한 러시아에 보복을 가하는 한편 미국 셰일 산업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분석했다. 미국은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원유 시장을 조작한다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를 겨냥했다. 미국 에너지부 샤일린 하인스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내고 “원유 시장을 조작해 (시장에) 충격을 주려는 국가 행위자들의 이러한 시도는 전 세계 파트너와 동맹국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자로서의 미국의 역할 중요성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NYT)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높은 유가에 의존하지만 석유 생산자 중 생산 비용이 가장 낮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도 수익성 있게 운영할 수 있고 러시아는 충분한 재정 준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도 “러시아는 균형 예산을 달성할 수 있는 원유 가격을 배럴당 42달러로 상정해뒀다”면서도 “최근 수 년 동안 석유 수입 초과분을 통해 1,700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조성한 덕분에 러시아는 당분간은 유가 하락기를 버틸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올해 석유 수요가 지난 2009년 이후 첫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으면서 점유율 경쟁이 장기화할 경우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도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IEA는 올해 국제 석유 수요가 전년에 비해 일일 기준 9만배럴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파티 비롤 IEA 수석 경제학자는 “석유 시장에서 ‘러시안 룰렛’ 경기를 하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박성규기자 exculpate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