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다시 늘어도 야근 꿈도 못 꿔요"…코로나로 드러난 '소주성의 민낯'

■서울 인현동 인쇄거리 가보니
코로나 여파 인쇄물량 70% 급감
"망할판인데 휴업수당 주라니" 발끈
진정돼도 '52시간' 탓 야근 못해

11일 오전 서울 중구 인쇄골목. 평소 같으면 각종 인쇄물을 나르는 ‘삼발이’와 업계 종사자들로 분주할 거리가 이날은 썰렁하다. /허진기자

# 서울시 중구 인현동 인쇄거리에서 인쇄공장을 운영하는 임정구(62) 사장. 임 사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일감이 떨어지자 정부의 지원도 받지 않고 유급휴업수당을 주고 근로자들을 쉬게 할 정도로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임 사장은 주52시간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야근을 시켜서라도 경영을 정상화해야 하는데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임 사장은 “공짜로 야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근로자들도 수당을 받으면 좋다고 한다”며 “만약에 법대로 야근을 안 하겠다고 하면 방법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제’가 근간을 이루는 소득주도 성장의 부작용이 코로나19로 표면화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내수 경기가 침체하자 최저임금 급등으로 인한 인건비 인상은 ‘유급휴업수당’ 문제로 이어졌다. 규모가 큰 기업은 주52시간제가 부담이 될 코로나19 이후를 앞당겨 걱정하고 있다.

서울 인쇄업체의 약 68%(5,500여 곳)가 밀집해 있는 인현동 인쇄골목은 서울 최대의 인쇄업 밀집지다. 서울경제가 11일 오전 찾은 이곳 골목은 평소 같으면 한창 분주할 시간대임에도 ‘삼발이’의 짐칸은 썰렁했다. 삼발이는 인쇄·제본·코팅 등 서로 다른 공정을 맡은 업체들을 오가는 짐차다. 이날 만난 한 배달원은 “예년에 비해 물량이 70%가량 줄었다. 한창 바쁠 겨울인데 여름 물량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인쇄업은 졸업·전시·세미나 등이 몰리는 연말연시와 봄철에 일감이 몰리고 날씨가 더워 행사를 자제하는 여름에 한산해진다. 다시 말해 ‘일이 없다’는 얘기다. 방문한 업체마다 기계는 멈춰 있었고 출근한 직원들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11일 찾은 서울 중구 인쇄골목에 자리한 한 인쇄업체 내 기계. 예년 같으면 쉴새 없이 돌아갈 기계가 코로나19 여파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허진기자

인쇄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불황의 원인을 단순히 코로나19로만 돌릴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최저임금 급등이 유급휴업수당의 인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노동계 전문가들은 수당이 많고 기본급이 적은 우리나라 임금 테이블 특성상 기본급을 최저임금에 맞춰놓는 경향이 많아 최저임금 인상률에 따라 기본급이 같이 오르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평균임금의 70%인 유급휴업수당 역시 최저임금 인상과 기본급 증가에 따라 연쇄적으로 따라 오를 수밖에 없다. 김남수 서울인쇄조합 이사장은 “최저임금이 전체적인 임금 인상을 가져오게 됐고 타격은 기업주가 안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 이후다. 주52시간제와 최저임금·노동경직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인쇄업자들은 주52시간제가 인쇄업계와는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각종 보고서·판촉물 등은 주문 2~3일 후가 납기일로 정해지기 때문에 야근과 휴일근무가 잦다. 익명을 요구한 인쇄업체 대표 A씨는 “최근 주52시간제에 맞춰 주말·휴일 야간근로를 없애는 방식으로 근무조를 변경했다”며 “발주처에서 요구한 시간에 맞춰 인쇄물을 찍어내려면 주말에도 쉴새없이 인쇄기계가 돌아가줘야 하는데 인쇄업계에는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인건비 부담에 새로운 직원을 뽑기는 어렵다. 김 이사장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임금 편차가 줄어들어 직장 내 불협화음도 많다”며 “기술과 경력이 많은 사람이 불만을 토로한다”고 말했다.

직원을 쉬게 할 수도, 일하게 할 수도, 줄이고 늘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인쇄 사업자들은 단순한 설문조사서 등에 양면테이프를 붙이는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다. 김모 Y커뮤니케이션즈 대표는 “지금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몇 명 쉬게 하는 것도 어렵다”며 “인건비만 고정비용으로 계속 나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허진·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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