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증산 전쟁에 나선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장외 설전을 이어가는 가운데 국제유가가 다시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사우디·러시아와 함께 3대 산유국인 미국도 석유 패권전쟁에 돌입할 수 있는 만큼 당분간 ‘저유가 시대’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견제하면서 장기집권 시나리오를 굳건히 하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심까지 겹쳐 신석유전쟁의 포화는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은 사우디와 러시아가 산유량 감산 문제를 놓고 물밑에서 협상 중이라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11일(현지시간) 전했다. 통신은 칼리드 알팔리 사우디 투자장관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 OPEC+(석유수출국기구와 주요 10개 산유국 연대)에서 알렉산드르 노바크 러시아 에너지장관과의 이견을 해결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전혀 논의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WSJ는 사우디 정부 소식통 등을 인용해 직전 에너지장관이었던 알팔리 장관과 노바크 장관이 증산 결정 철회와 원유수급 조절을 위한 양측의 협상통로 복원을 위해 물밑에서 논의를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SPA통신은 “알팔리 장관은 에너지장관인 압둘아지즈 빈 살만 왕자가 주도하는 석유정책을 완전히 지지한다”며 “알팔리 장관은 이번 논의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고 일부 언론이 보도한 바와 달리 러시아를 방문할 계획도 없다”고 강조했다.
사우디는 지난 6일 OPEC+ 회의에서 러시아의 반대로 추가 감산 합의가 결렬되자 오는 4월부터 현재 산유량보다 27% 많은 하루 1,230만배럴까지 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더해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는 지속 가능한 산유 능력을 현재 일일 1,200만배럴에서 1,300만배럴까지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증산 방침을 공식화한 사우디가 러시아와의 휴전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이미 급락한 국제유가는 수직낙하하는 분위기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4.0% 내린 32.9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런던 ICE선물거래소의 5월물 브렌트유도 약 4% 하락한 34달러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사우디와 러시아 간 이견조정 뉴스로 등락이 있을 수 있지만 감산에 대한 이견이 커 유가는 하방 압력이 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올해 WTI 가격 전망치를 종전 배럴당 55.71달러에서 31% 낮춘 38.19달러로 잡았다고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전했다. EIA는 또 올해 미국 원유 일일 생산량도 당초 전년 대비 6% 증가한 1,299만배럴에서 21만배럴 감소한 1,278만배럴로 전망했다.
문제는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사우디가 이번 증산 결정을 놓고 미국과도 엇박자를 내면서 원유시장의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백악관은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빈 살만 왕세자와 통화하며 국제에너지시장 상황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통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 셰일오일 산업 보호를 위해 사우디의 증산에 부정적 의견을 전달했다는 관측이 대체적이다. 시점상 사우디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 이후 대규모 증산을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사우디가 미국의 반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증산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빈 살만 왕세자와 푸틴 대통령이 원유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트럼프 대통령을 숙명의 대결로 끌어들였다”고 분석했다. CNN방송은 “빈 살만이 푸틴과 얼마나 오랫동안 석유전쟁을 벌일지는 불투명하다”면서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유대에도 긴장이 나타날 뿐 아니라 자국의 석유중심 경제구조를 개혁하겠다는 약속 또한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기혁기자 coldmeta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