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유업계가 정제마진 악화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았다. 올 상반기 사상 최대 규모의 글로벌 석유 수요 감소가 예상되는 가운데 국내에만 존재하는 ‘갈라파고스 규제’들이 정유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국내 정유사의 가동률은 급격히 하락했다. 지난 2018년 4·4분기 102.6%에 달했던 국내 정유사들의 공장 가동률은 2019년 1·4분기 99.1%로 낮아졌고 3·4분기에는 84.8%, 4·4분기 82.2%로 고꾸라졌다. 최근 국내 1위 사업자인 SK에너지는 정제공장 가동률을 약 15% 낮췄고 추가 하향을 검토하고 있다. SK에너지가 감산에 나서는 것은 2009년 이후 10여년 만이다.
이는 정유사의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 악화와 관련이 깊다. 정제마진은 지난해 9월 10.1달러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 계속 하락해 손익분기점(BEP)인 5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다. 올해는 전 세계에 코로나19가 확산하며 항공·자동차 등의 이동 수요가 줄고 소비심리가 위축돼 석유 수요가 더욱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최근 급락한 국제유가도 국내 정유사들의 단기 실적을 악화하는 요인이다. 정유사가 과거 높은 가격에 구매한 원유 재고의 평가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우호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2월 이후 유가 급락으로 SK이노베이션(096770)과 에쓰오일의 합산 재고손실이 3,283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 정책은 국내 정유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원유에 붙는 3%의 수입관세다. 한국은 비산유국 중 원유에 관세를 부과하는 유일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다. OECD 비산유국들은 기초 원자재인 원유에 무관세를 적용하고 있고 산유국인 미국이 관세를 배럴당 5.25센트씩 부과한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기업의 수출을 활성화하기 위해 외국 제품에 핸디캡을 주는 것이 관세지만 정유업에는 반대로 작용하고 있다”며 “요즘처럼 시황이 나쁠 때는 한시적으로라도 인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국내 정유사들은 준조세인 석유수입부과금까지 부담해야 한다. 정유 4사가 지난해 정부에 낸 석유수입부과금은 1조4,086억원에 달한다.
이는 이미 지리적 핸디캡을 떠안고 싱가포르 등지의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정유 산업의 경쟁력 악화로 이어진다. 최근 정유사들은 베트남 등 동남아 시장으로 눈을 돌려 수요 악화에 대응하고 있다. 이때 원유 생산지인 중동과 동남아 시장에 모두 가까운 싱가포르의 두 배가 넘는 운임이 든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싱가포르까지 운임은 배럴당 80센트인 반면 한국까지 운임은 배럴당 1달러66센트다. 국내 정유사가 제품을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1달러70센트의 운임을 내야 한다.
최근 같은 불황에는 벙커C유를 고도화할 때 내야 하는 개별소비세 또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정제마진이 악화하면 정유사는 제조원가 절감을 위해 벙커C유 등을 정제공정 원료로 다시 투입한다. 원유증류장치(CDU)를 통해 벙커C유를 경유·휘발유 등의 제품으로 고도화해 판매하면 수익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때 정유사들이 벙커C유에 ℓ당 17원의 개별소비세를 부과받는다는 점이다. 최종소비재에 붙는 개별소비세가 선박유 등으로 판매되는 벙커C유에 부과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정유업계에서는 CDU에 재료로 투입될 때도 같은 세금을 내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벙커C유가 휘발유·등유·경유가 아닌 나프타·항공유·윤활유 등으로 고도화된 경우 개소세를 환급을 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정유사들이 돌려받지 못하는 개소세는 연간 수백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경쟁국 일본의 경우 벙커C유에 세금을 적용하지 않아 비용 경쟁력이 높다”며 “원료로 사용되는 벙커C유에 대해서는 조건부 면세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급격히 강화된 규제에 비해 안전·환경에 대한 투자 인센티브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조세특례제한법 개정 당시 여야 의원은 세제 인센티브를 3%대로 확대하는 개정입법안을 냈지만 기획재정부는 1%대 공제율을 유지했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환경규제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고 호소했다.
/박효정기자 j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