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염혜란 /사진=에이스팩토리
2011년 가을, 사람 참 찾아오기도 어렵겠다 싶은 구로의 한 극장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기자 몇 명 오지 않은 연극의 최종리허설, 작품 이름은 ‘쥐의 눈물’이었다.
재일교포 극작가이자 연출인 정의신의 작품으로, 전쟁통에 함석으로 된 버스를 밀고 다니며 병사들에게 연극을 하고 얻은 음식으로 먹고사는 쥐 유랑극당 ‘천축일좌’ 이야기. 자신들과 무관한 전쟁에 자식을 잃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웃어야만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그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정의신 연출의 현재 상영중인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연극 ‘야끼니꾸 드래곤’)과도 궤를 같이 한다.
엄마쥐(스즈)로 등장한 염혜란의 춤과 노래는 나무 몇그루 박혀있는 산처럼 보이는 객석마저도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전쟁에 휘말린 아들과 딸의 죽음 앞에 “우리에게 아들(딸)은 없었던거야”라고 절규하지만, 또 살기 위해 버스를 끌고 다음 전장으로 가기까지….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매력에 다음날 다시 관객들이 채워진 극장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느꼈다. ‘아. 이 배우 괴물이다’
당시 연극에는 문외한이었기에 그가 더 괴물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다 순식간에 몰려오는 공포와 슬픔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어떻게든 삶은 이어진다는 그 징한 메시지를 우겨넣기까지. 이 복잡한 인물의 마음을 순리대로, 개연성 있게 표현한다는건 보통 일이 아니다. 이 괴물같은 연기가 실력인지 다시 또 다시 확인하기 위해 수년간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3월의 눈’ 등 그가 출연하는 작품이면 열일 마다하고 극장을 찾기도 했다.
연극 ‘쥐의 눈물’ 공연장면
이후 공연보는 부서를 떠난 사이 문득문득 생각은 났지만, 보통의 배우들처럼 곧 만나겠지 하는 생각에 조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2016년 드라마 ‘도깨비’에서 은탁의 이모로 그를 마주했을 때 길에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이제 사람들이 알아줄 때가 온 것 같다고.
약간 과한 듯한 표정과 몸짓, 그래서 더 비현실적인 악당은 ‘판타지’를 표방하는 ‘도깨비’와 잘 맞아떨어졌다. 특히 기억을 잃은 뒤 천연덕스런 모습은 따라올 배우가 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눈에 확 띄는, 그것도 재미에 치중된 캐릭터였다는 점에서 다소 위험해보이기도 했다. 비슷한 캐릭터의 작품만 들어올 가능성도, 본인이 고착화를 우려해 자신과 맞지 않는 작품을 선택하는 모습도 많이 봐왔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기로운 깜빵생활’에서 마약 투약으로 들어온 아들을 매정하게 대하는 ‘한양 엄마’로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 우려는 남아있었으나 후반부 그 이유가 밝혀지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염상수(이광수)의 엄마로 출연한 ‘라이브’에서 역시 “엄마 청소하는거 아무도 안 알아줘도 세상에 필요한 일이야. 경찰 일도 아무도 안 알아줘도 세상에 필요한 일이야. 힘내”라는 대사를 통해 아들과 찡한 진심을 교환하는 장면에서는 무릎을 탁 쳤다.
드라마와 영화 등 장르의 틀을 넘어 감독과 작가들이 그를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을 무렵부터 그는 변화무쌍한 캐릭터 변신을 거듭했다. ‘무법 변호사’의 악역, ‘라이프’의 든든한 오른팔을 거쳐 ‘동백꽃 필 무렵’에서 아주 멋들어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노규태(오정세) 쥐잡듯이 잡는 이혼전문변호사로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심지어 ‘스토브리그’의 오정세를 두고 “자영언니 노규태 이상한데서 뻘짓하니 좀 데려가라”는 시청자들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드라마 ‘도깨비’, ‘라이브’, ‘동백꽃 필 무렵’ 장면
그가 캐릭터의 확장성을 증명해가고 있는건 확실하지만, 오랜 팬 입장에서 ‘얼굴은 웃되 속은 울어버리는’ 강렬한 캐릭터를 보고싶기도 했다. 눈물을 뚝뚝도 아니고 이게 눈물인지 콧물인지 분간도 안되게끔 울려버리는, 그 심장 쥐어짜는 모습까지 보여주면 더할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주조연도 아닌 딱 한회분 특별출연에서 그 연기를 보여줬다.
지난 12일 첫 방송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그는 3년간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꼬장꼬장한 엄마로 등장했다. 아이가 피부 까지는 것에 민감해하고, 어제 약 처방이 지난달과 다르고, 피는 왜 더 뽑아가냐고. “하루에 한두 번 보고 가는 의사들보다 내가 훨씬 더 잘알지. 내가 엄만데.”
결국 아이가 숨진 뒤 그는 의사들을 소집한다. 그리고 안정원(유연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말한다 “선생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 민영이 욕심 많은 엄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간호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만나서 3년동안 행복하게 살다 갔습니다. 민영이 사랑해 주시고 잘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사들에게는 머리 터지게 만드는 보호자였으나, 정말 어쩔 수 없었음을…. 뒤늦은 감사를 전하는 염혜란의 떨리는 손과 흐르는 눈물, 그 얼굴에 담긴 보이지 않는 말들을 연기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의 앞에서 선 유연석의 눈물도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사 댓글과 홈페이지 시청자게시판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지만, 눈물 한웅큼 쏟은 시청자들이 부지기수였으리라. 그리고 그 장면에서 2011년 ‘괴물같다’고 느꼈던 그때의 모습을 봤다.
공연판에서 오래 살아남은 배우에게는 영상매체에서도 자신만의 자리가 주어진다고 믿는다. 이정은의 ‘미스터 션샤인’과 ‘기생충’, 배성우의 ‘베테랑’, 진선규의 ‘범죄도시’, 박해수의 ‘슬기로운 깜빵생활’ 등 많은 배우들이 맞춤옷을 입고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이제 슬슬 그도 맞춤옷을 입어야 할 때가 왔다. 더 좋은 작품, 더 뚜렷한 캐릭터 만나시라. 그 작품 하늘로 훨훨 날아오를 테니.
‘슬기로운 의사생활’ 장면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