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나의 미술로 보는 시대]부유한 지주 가족의 초상, 참혹한 농촌 현실을 가리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기록의 욕망
17세기이후 초상화 형태로 발현
동양에선 근대이후 본격적 유행
조상숭배·가문과시의 의도 담겨
남장여인 내세운 백남준 가족사진
근대 여성의 달라진 위상 엿보여
민족의 절절한 비극 화폭에 그려낸
임옥상 '6·25후 김씨일가' 인상적


조상의 두상을 들고 있는 로마의 귀족. 기원전 50~15년경 제작된 조각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이 죽으면 그 모습을 기억하고자 하는 욕망은 예로부터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직접 왁스나 석고로 뜨기도 했는데 후일 여기서 발전한 것이 데스마스크로, 주로 초상 조각을 제작하는 데 참고했다. 그런데 로마 공화정 시기에는 참고용이 아니라 죽은 가족의 실제 모습을 왁스나 대리석으로 제작해 캐비닛 같은 개인적인 공간에 모셔두었다. 이것은 일종의 조상 숭배 관습의 하나로, 가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 방법이었다. 로마인들은 신체적 특징에는 관심이 없었고 얼굴을 중요시해, 주름살·털끝 하나라도 틀리지 않게 묘사해 세밀함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조각가들은 작업실에 머리가 없는 신체 조각들을 여러 점 미리 준비해 놓고 주문이 들어오면 그제야 죽은 사람의 두상을 마치 사진처럼 유사하게 제작해 신체와 합치곤 했다. 기원전 1세기에 제작된 ‘조상의 두상을 들고 있는 로마의 귀족’의 경우 서 있는 인물이 들고 있는 두상들의 두툼한 얼굴은 이 집안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보인다. 반면 그들의 후손일 서 있는 인물의 얼굴은 더 홀쭉해 조금 다르다.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이 인물 조각의 원래 두상이 없어져 할 수 없이 다른 두상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한다.

요한 조파니의 1767년작 ‘아크홀 3세 존과 그의 가족’

가족의 초상화가 많이 제작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였다. 그런데 가족 초상화의 공간 구성에서는 가족 간의 서열 또는 심리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독일의 화가 요한 조파니(Johann Zoffany·1733~1810)가 그린 ‘존, 애트홀 공작 3세와 가족’은 자연 속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단란한 가족을 보여준다. 화면 왼쪽에는 아버지와 장남을 그려 구성이 매우 여유로운 반면 오른쪽 사과나무 밑에는 어머니와 여섯 아이들이 비좁게 몰려있다. 왼쪽은 숫자로는 두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시선을 끌면서 이 남자아이가 가문의 대를 이어갈 장남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머니와 여섯 아이들이 결실, 또는 풍요·다산을 나타내는 과일과 꽃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멀리 배경에 그려진 울타리는 이 목가적인 초원이 그들의 사유지라는 것을 알려준다. 18~19세기에 많이 제작된 이러한 그림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잘 가꾸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부유한 지주의 삶을 나타낸다. 최근의 미술사학자들은 화가들이 자연의 시각적 매혹을 그림으로써 당시 농촌의 어려움이나 농민의 참혹한 현실을 잊게 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가족 초상화는 동양의 경우 근대 이후에 발전한 회화의 한 종류다. 중국 청나라에서는 몇 대에 걸친 가문의 인물들을 여러 명, 또는 수십 명씩 하나의 화폭에 그리는 선세도(先世圖)가 유행했다. 이것은 조상숭배의식과 관련이 있지만 가문의 번창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왕이나 사대부의 초상은 유교적 전통의 하나로 많이 그려졌으나 가족초상의 시작은 1880년대 들어온 사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초상화를 주문하기 어려웠던 일반사람들도 비록 비싼 가격이었지만 신분에 상관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진은 인물 기록의 새로운 방법으로 각광을 받았다. 당시 초상사진들은 대개 전신상으로,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학적인 도구로 여겨지던 카메라에 찍힌 초상사진은 실제 인물보다 더 사실적으로 여겨졌고 기념적인 목적을 더 정확히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에 사진관이 생긴 것은 1876년에 수신사의 기술직 전문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던 화원 김용원(1842~1892)이 그곳에서 본 사진술에 관심을 가진 것과 관련이 있다. 귀국한 후 1883년에 그는 서울 저동에 일본인 사진사 혼다 슈노스케를 고용해 촬영국을 개국했고 나중엔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수신사의 일원인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던 지운영(1852~1935) 역시 고베에서 사진술을 배워 귀국 후 촬영국을 개설해 사진을 시작했다. 한편 관료 출신이자 재력가였던 황철(1864~1930)은 1882년 3개월간 상해에서 사진술을 배워 고위 관리나 명승고적, 궁궐 등을 찍었다. 그는 고종에게 초상화는 이제 사진으로 대체해야 하고 도화서를 폐지해야 한다는 상소도 올렸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는 미천했고 여러 가지 흉흉한 이야기가 돌았다. 사진을 찍으면 수명이 짧아진다든가 어린아이들을 유괴하여 삶아죽이고 그 눈으로 사진 약을 만든다는 식의 끔찍한 소문도 있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 때에는 사람들이 사진관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배운성이 1930~35년에 그린 ‘가족도’

1910년 전까지 국내의 사진관 영업은 거의 일본인 사진가들 중심이었지만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진관들도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인기가 있었던 사진들은 돌 사진을 비롯해 회갑이나 결혼 등을 기념하는 가족사진이 많았고, 기로소 같은 곳에서도 단체로 찍는 경우들이 있었다. 초기의 가족사진에서는 대개 모두 카메라를 향해 정면을 응시하는데 이런 구도는 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후에 월북 작가가 된 배운성(1901~1978)의 ‘가족도’(1930-1935)에서도 모두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배운성이 서생으로 있던 갑부 백인기의 집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배운성이 독일에 가서 화가가 된 것도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이 베를린에 갈 때 동행했다가 백명곤은 건강이 나빠져 귀국하고 배운성은 그대로 남아 그림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가족의 초상화는 가족의 서열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구성의 중심에 할머니가 앉아 있으며 장손자는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 독일에서 그림을 그렸던 배운성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화면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앞에 서 있는 사람들 뒤로 대청마루에 앉아 있거나 방에서 내다보는 인물들을 그리고 창 너머엔 풍경을 그려 넣었는데, 이러한 구성은 북유럽 르네상스 그림에서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다. 가족의 일원은 아니지만 배운성 자신도 화면 맨 왼쪽에 흰 두루마리를 입고 나타난다.

백남준의 1984년작 ‘해제된 가족사진’

1930년 초에 찍은 유명한 비디오 작가 백남준의 가족사진은 매우 흥미롭다. 백남준의 아버지는 구한말 섬유업의 거상이었던 백낙승으로, 그 가족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빠르게 서양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당시 일반인은 꿈도 못 꾸던 자동차와 피아노도 소유했다고 한다. 이 사진을 처음 보면 전통 한복의 여인에서부터 학생 교복을 입은 남학생, 신식 양복의 남성 등의 평범한 가족사진으로 보이나 사실은 모두 여성들이다. 맨 앞 왼쪽에 남자들이 입는 두루마기와 갓을 쓴 백남준의 어머니를 비롯해 여러 명의 친척들이 남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백남준은 1984년에 이 사진을 공개하고 작품화하면서 이들이 모두 누구인지를 밝혔다. 그는 어느 날 집안에 모인 친척 여성들이 재미로 남장을 하고 동네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관에서 이 사진을 진열장에 내거는 바람에 남사스러워 한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1930년대에 가정주부들이 남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은 놀랍고 이런 점에서 근대기 조선인의 정체성, 남녀의 개념은 생각보다 유동적이지 않았을까 추측도 해본다. 1930년대는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속에서도 사람들이 점차 국제적 문화에 눈을 뜨고 여성들도 전통적인 남녀 구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임옥상의 1990년작 ‘6·25 후 김씨 일가’

대가족의 모습은 한국사회가 1950년대 이후 핵가족 중심의 사회로 전환하면서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임옥상의 ‘6·25 후 김씨 일가’(1990)에서 다시 나온다. 배운성의 ‘가족도’를 연상시키듯 모두 정면을 보고 있는 이 작품에서 가족 중 여러 명의 자리가 허옇게 비어있다. 이들의 생사 여부에 대한 힌트나 정치적인 서사는 없지만 그 비어있는 자리가 민족의 비극을 절절히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초상화는 역사화적 성격을 띤다고도 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前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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