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1839년 英 헨리 로열 레가타

시골마을 위기 타개책

1890년대의 헨리 로열 레가타. 오늘날까지 관중과 선수로 북적거린다.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그림

1839년 3월36일 영국 옥스퍼드셔주 헨리(Henley). 런던에서 템스강을 따라 북쪽 50㎞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헨리의 유력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갈수록 인구가 줄고 소득도 떨어지는 현실을 타개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막상 뾰족한 방안은 안 나왔다. 산업혁명이 시작돼 공장지대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붙잡기 어려웠다. 운하 건설 붐으로 템스강의 하천 운송 물동량도 분산된 마당에 한숨만 쉴 때 선장 출신인 한 유지가 ‘레가타(Regatta·조정경기)를 유치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토론 과정에서 ‘실패할 것’이라는 반론이 나왔으나 두 가지 논리에 밀렸다. 첫째는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간 조정경기(the Boat Race)의 벤치마킹. 1829년과 1836년에 열린 두 학교의 라이벌 대결에 몰렸던 수많은 인파의 일부라도 유치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통했다. 둘째는 ‘안보 스포츠’론. 어깨와 팔·손아귀 등 상체뿐 아니라 하체까지 골고루 사용하는 조정은 이상적인 근육운동일 뿐 아니라 단결이 필요해 유사시 전장에 나가야 하는 영국 신사의 필수운동이라는 논리가 먹혔다. 넉 달 뒤, 바로 남자 경기가 열렸다.

헨리 마을은 활기에 넘쳤으나 오래 못 갔다. ‘짝퉁’ 탓이다. 템스강 인근의 마을마다 조정경기를 만드는 통에 관광객과 수입이 줄었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할 만큼 늘어난 위기의 순간에 차별화할 수 있는 무기가 생겼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이 방문하고 ‘로열(Royal·왕립)’이라는 칭호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준 덕분이다. 헨리 레가타에서 ‘헨리 로열 레가타’로 바뀐 1851년 이후 지금까지 조정경기는 확대됐다. 종목이 8개로 늘어나고 세계 각국에서 조정팀이 몰려든다. 올림픽을 부활시킨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결성할 때 헨리 로열 레가타를 본떴다. 헨리라는 지명까지 각국에서 고유명사화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을 오가며 개최되는 미국 조정경기의 애칭이 ‘아메리칸 헨리’다. 캐나디안 헨리와 오스트레일리아 헨리도 있다. 19세기 초중반 런던 변방의 ‘시골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가 21세기까지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 제임스 엘윈 옥스퍼드대 교수에 따르면 요즘도 헨리 마을은 조정 부문에서만 연간 3,000만파운드를 벌어들인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벌이는 지역 축제도 헨리 마을처럼 뿌리내리면 좋겠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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