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상사중재위원회(ICC)를 통해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과 재무적투자자(FI) 간 분쟁 조정이 진행 중인 가운데 교보생명이 미국 회계감독기구(PCAOB)에 FI 측 공정시장가치(FMV) 산출을 담당했던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을 고발했다. 주주 간 분쟁 발생 이후 첫 회사 차원의 공식 대응이다.
교보생명은 31일 PCAOB에 딜로이트 안진을 평가업무 기준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고 밝혔다. 교보생명은 “주주 간 분쟁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분쟁이 장기화되면서 당사의 평판이 크게 저하되고, 경영안정성이 침해되고 있으며, 유무형의 영업상 손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이러한 손해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이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의 FMV 산출 문제에 있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교보생명은 또 “ICC 중재판정부가 어피니티컨소시엄 주장을 온전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면서도 “만일 이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해 최대주주에게 주당 40만9,912원에 매수하라고 판정하고, 최대주주가 충분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지배구조의 변동 가능성이 있는 특정거래에 해당 될 수도 있는 사안으로 판단돼 공시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소송은 2012년 9월 신 회장이 당시 대우인터내셔널 등이 보유했던 지분 24.01%를 홍콩계 사모펀드인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 등 FI들에게 약 1조2,000억원에 매각하면서 맺은 계약에서 비롯됐다. FI는 2015년 9월까지 교보생명이 기업공개(IPO)를 하지 않으면 신 회장 개인에게 풋옵션(지분을 되팔 권리)을 행사할 수 있는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문제는 교보생명이 약속 시한보다 3년을 넘긴 시점에도 상장하지 못하면서 발생했다. 이에 2018년 10월 FI는 안진에 FMV 산출을 의뢰했고 안진은 풋옵션 행사가로 40만9,912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 회장은 계약의 적법성과 유효성을 문제 삼으며 풋옵션 절차에 응하지 않았다.
교보생명이 안진을 고발한 것은 주주 간 분쟁의 최대 쟁점인 풋옵션 행사가 산정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다. 2018년 10월 풋옵션 행사 당시 FI는 2017년 6월30일부터 직전 1년을 기준으로 행사가를 산정했다. 비교 대상은 삼성생명·한화생명·오렌지라이프였는데 당시는 생보사 주가가 최고조여서 삼성생명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8, 한화생명은 0.6이었다. 그러나 2018년 하반기 보험주가 일제히 하락하면서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의 PBR은 0.5, 0.2로 떨어졌다. 신 회장 측은 계약서에 회계법인 선정방법만 규정했을 뿐이라며 FI 측이 제시한 가격 자체가 터무니없다고 반발했으나 가격 산정을 담당한 안진에 대해서는 별도의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ICC 중재로 신 회장과 주주 간 서면공방이 시작됐고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회사 차원의 내용 파악과 공시가 필요하다는 당국의 지침에 따라 신 회장에게 공식 서류 열람을 요청했다”며 “선량한 관리자로서 의무를 지켜야 할 안진은 풋옵션 행사일이 2018년 10월23일이었는데도 행사 시점이 아닌 2018년 6월30일을 기준으로 직전 1년을 주가 산출기간으로 적용해 풋옵션 행사가격을 과대평가했다”고 주장했다. 그간 계약 당사자가 신 회장인데다 계약상 비밀유지 조항에 따라 회사 차원의 개입을 자제했으나 최대주주는 물론 기업에 직간접적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판단한데다 당국에서도 개입의 근거를 마련해준 만큼 앞으로 회사 차원의 대응을 본격화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ICC 중재 결과 통보가 올해 말이나 내년 초로 점쳐지는 만큼 교보생명은 중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회사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찾아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교보생명은 미국에 이어 국내에서도 안진에 대한 소송 추진을 검토하고 있고 안진회계법인의 관리 감독을 맡는 딜로이트 글로벌에 대해서도 뉴욕주 법원에 손해배상 소장을 냈고 접수를 기다리는 중이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