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한은이 경제방역전 주포 맡아야 …지금은 '디플레 파이터'로 변신할 때"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전 자본시장연구원장)
위기의 본질은 현금 고갈…이미 '기술적' 디플레이션 진입
코로나 2개월 이상 더 가면 '금융안정펀드' 실탄 부족 위험
관군은 뒤로 빠지고 의병을 앞세우는 대처는 더 이상 곤란
회사채·CP 직매입 채널 열어 두도록 한은법 개정해야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 상황은 기술적으로 디플레이션에 진입했다”며 “이번 위기 대응의 주포는 중앙은행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19 전쟁에 의병도 나서는 마당인데 경제 방역에 주력군이 뒤로 빠져 있다”고 꼬집었다. /성형주기자

재정정책이 우선이냐, 통화정책이 우선이냐. 정책당국자들의 영원한 숙제다. 때로는 서로 등을 떠밀기도 한다. 기준금리가 0%대로 떨어진 현재는 전통적 금리정책이 먹혀들지 않는다면 사정이 다르다. 대안은 있다. 발권력을 동원한 유동성 공급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넘어 대공황에 비견되는 위기상황인 지금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재정정책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발권력 활용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안 교수는 “이번 위기의 본질은 산업 셧다운에 따른 현금 고갈”이라며 “이미 기술적으로 디플레이션에 진입했기에 위기 대응의 주포는 중앙은행이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축통화국이 아닌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무제한 돈을 찍어낼 수 없다”며 “은행권에 돈을 공급하는 양적완화와 더불어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직접 매입하는 질적완화를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경제적 파장과 충격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 교수는 빠른 회복을 의미하는 ‘V자’ 반등을 예상했다. 반대로 수직 추락하는 ‘I자형’ 침체를 전망하는 비관론자도 있다. 현재로서는 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충격의 강도는 바이러스 퇴치 여부에 달려 있다 . 이건 경제학자 예측 밖의 영역이다. 예컨대 말라가는 연못이 있다면 언제 비가 오느냐가 연못 속 물고기의 생존 여부를 좌우할 것이다. 어류학자가 예측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바이러스가 빨리 종식된다면 버냉키 교수의 말이 맞겠지만 2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L자형’ 침체에 들어갈 것이다.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현금의 고갈이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이 무너지고 산업이 셧다운됐다. 영업이 안 돼 현금이 들어오지 않아 기업의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기업의 선택지는 보유자산 매각뿐이다. 위험자산이든 안전자산이든 돈 되는 것은 다 팔 것이다. 최근 가장 안전하다는 미국 국채의 금리가 일주일 사이 0.7%포인트 급등(국채 가격 하락)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방증이다. 시장이 공포를 경험하면 노이로제에 걸린다. 앞으로 작은 뉴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코로나 쇼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의 한 트레이더가 마스크를 쓴 채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뉴욕=로이터 연합뉴스

-패닉성 투매는 다소 진정됐는데.

△미 연준의 CP와 회사채 매입 효과가 컸다. 유사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안심시켜준 것이다.

-연준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CP를 직접 매입하지 않았다. 이번에 ‘질적완화’를 단행한 이유는 뭔가.

△시장에 맡겨두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했다. 미국 국채 금리가 일주일 동안 그렇게 오른 것은 일대 사건이다.

-지난주 발표된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평가한다면.

△실탄의 양이 중요한데, 2개월 안에 종식되면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 장기화하면 부족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산업구조는 상당히 수직적이다. 대기업 하나 망하면 수많은 협력회사가 덩달아 망한다. 단기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금융시장 안정펀드의 재원을 금융권이 대는데, 금융권도 제 코가 석 자 아닌가.

△금융권이 공적 기능을 담당하라는 요구는 과거부터 숙명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양면성이 있다. 이런 관치금융의 전통은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시장 참여자 공동으로 위기를 막는 순기능도 있다. 그럼에도 민간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정부 정책에 동원되니 날벼락 맞은 심정일 것이다. 문제는 발권력을 지닌 한국은행이 비켜나 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의병은 정유재란 때 관군의 통솔을 받았다. 지금 위기 대처 방식이 딱 그런 식이다. 언제까지 관군은 뒤로 빠지고 의병을 앞세울 것인가. 거의 10년마다 위기가 되풀이돼왔다. 위기 대응 체계와 자금조달 방식 등을 이제는 체계화해야 한다.

-한은의 책임과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이번 위기에 맞서 양적·질적 완화로 직접적인 시장개입 정책을 펴고 있지 않나.

-구체적으로 뭐가 필요한가.

△전 세계적인 현금 선호 현상은 이미 기술적으로는 디플레이션(deflation)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인플레이션 유발 정책이 요구된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제1 정책목표로 삼기에 흔히 ‘인플레이션 파이터(inflation fighter)’라고 부르지만 2008년 이후 고물가를 걱정한 적이 없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대책이 요구된다. 지금 중앙은행은 ‘디플레이션 파이터’, 나아가 ‘크라이시스(crisis·위기) 파이터’ 역할이 요구된다.


-한은도 3개월 동안 양적완화를 한다고 했는데.

△시장안정에 당연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연준이 세 차례 양적완화로 3조6,000억달러를 뿌렸지만 이 가운데 2조7,000억달러가 도로 연준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9,000억달러만 가계와 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 연준의 돈을 받은 금융권이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연준이 이번에 무제한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이런 누수 현상을 고려한 조치다. 엄청난 실탄을 쏟아붓고 이 가운데 일부만이라도 과녁(실물경제 지원)을 맞히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윤면식(왼쪽 두번째) 한국은행 부총재가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한국판 양적완화’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한은

-질적완화도 해야 한다는 말인데, 한국은행법상 금지돼 있다.

△금융통화위원회가 의결하면 가능하다. 문제는 법 조문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국채와 정부 보증채는 명시적으로 열거돼 있지만 금통위 지정 증권은 ‘발행조건이 완전히 이행돼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다. 한은은 회사채와 CP 매입과 관련해 최근 유권해석을 통해 불가 판정을 내린 것으로 안다. 반면 공공기관 채권에 대해서는 가능 판정을 했다. 유권해석이 정 그렇다면 회사채와 CP를 직접 매입하는 채널을 열어두도록 이번 기회에 한은법 개정을 해야 한다. 금통위원 누군가가 한은법 개정의 필요성을 거론할 줄 알았는데 실망스럽다. 정밀타격인 질적완화는 양적완화의 실탄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금융감독권이 사실상 없는 한은과 총괄감독권이 있는 연준을 단순 비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코로나 전쟁에 의병이 나와 싸운다. 발권력이라는 가장 큰 무기를 쥐고 있는 한은이 뒷짐을 지는 것은 곤란하다. 실탄만 금융권에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실탄을 줄 테니 탄피를 나중에 되돌려달라는 격이다. 이래서 제대로 싸울 수 있겠나. 감독 문제를 거론하면 논점이 흐려진다.

-한은법에는 금통위원의 손실배상책임 조항이 있는데.

△해외 중앙은행에는 없다. 당연히 삭제돼야 한다. 문제의 한은법 조항은 배임 문제에서 비롯됐다. 통화정책을 두고 배임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다. 해외에서는 아예 배임죄가 없거나 사문화돼 있다.

-앞으로 추가 국채 발행이 예상되고 야당에서는 40조원의 재난용 국민채권을 발행하자고 한다.

△마구 발행하면 어려운 상황이 온다. 국채 발행물량이 늘어나면 국채 금리가 올라 채권안정펀드의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한은의 국채 매입 압박이 증대할 것이다. 한은으로서는 본의 아니게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MMT)’ 논란에 휩쓸릴 수 있다. 정부가 국채를 찍어내고 중앙은행이 받쳐준다면 MMT 실행이 아닌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정부 뒤에는 여당이라는 정치권이 있다. 발권력과 포퓰리즘이 결합하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 한은법 개정은 입법권을 쥔 정부와 정치권보다 한은이 주도해야 MMT 논란을 줄일 수 있다.

-‘동학 개미운동’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미국 주식시장이 반 토막 나면 한국도 그렇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외국인은 위기 때 현금화하기 쉬운 이머징마켓에서부터 손을 털고 나간다. 바로 한국이다. 개미군단이 매도물량을 받아주면 외국인들이 덜 떨어졌다고 더 팔 수도 있다.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자본시장 과세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주식거래세는 가장 나쁜 세금이다. 손해를 보고 주식을 팔아도 세금을 떼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거래세의 유일한 장점은 초단타매매를 억제하는 효과뿐이다. 찔끔 내릴 게 아니라 해외처럼 폐지해야 한다. 양도소득세의 경우 부과 대상인 대주주의 기준(주식 보유 1% 또는 10억원)이 지속해서 낮춰졌다. 내년부터는 3억원으로 또 내려간다. 양도세 과세 취지는 대주주가 경영권 방어에 신경을 쏟도록 시세차익을 챙기지 말라는 데 있다. 대주주 기준을 상향 조정하고 금융상품의 손실과 이득을 통합해 과세하는 것이 옳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번 기회에 한은이 ‘질적완화’의 창구를 만들 수 있도록 한은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형주기자

He is …

1964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뉴욕대에서 재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경영대 교수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스코틀랜드왕립은행에서 컴퓨터 알고리즘에 기반한 투자전략인 퀀트 전략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위원회 등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자본시장연구원장을 지냈다.

■코로나19 위기가 소환한 현대화폐이론(MMT)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화폐를 계속 찍어내야 한다는 경제학 이론. 돈을 찍어낼 수 있으니 세금을 더 걷거나 재정적자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신통방통한’ 구상이다. 주류 경제학계는 이를 말도 안 되는 사이비 경제학, 재정 포퓰리즘이라고 일축한다. 이 이론대로라면 재정·통화정책의 경계가 흐려지고 중앙은행을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아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 급진 성향의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정책보좌관에 MMT 신봉자인 스테퍼니 켈턴 뉴욕주립대 교수가 포진하면서 특히 주목을 끌었다. 코로나19발 경제위기는 전 세계적인 돈 풀기 경쟁을 초래해 MMT의 실험장이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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